쓰디쓴 약을 넘기는 저녁
열선이 켜진 시트의 온기가 노곤하게 몸을 늘인다. 학원 근처 주차장에서 공사가 진행되며 조금 떨어진 공터에 주차를 하고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다. 출근해야 하는데. 코앞까지 왔건만 의욕이 일어나질 않는다. 시동을 끈 차에서는 천천히 열기가 사라져 간다. 바깥의 찬 공기를 마주하는 것,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것에 대한 머뭇거림이 게으름으로 이어진다.
출근 전의 게으름을 즐기던 중, 한 아저씨가 차 근처를 서성인다. 바지를 주섬거리더니,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노상방뇨다. 한밤중에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모습은 종종 봐 왔었지만, 이리도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아저씨가 떠나간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를 나섰다. 게으름의 대가가 이런 불쾌함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분명 수업 준비를 잘해 두었다고 생각하였건만, 어수선한 시작이다. 일찍 출근해 수업 자료도 뽑아 놓고, 아이들 출결 상황도 확인하던 중 손에 쥔 책에 툭, 무언가가 부딪힌다. 쨍-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텀블러에서 커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예감이 좋지 않다. 풀어야 할 문제를 나눠주고 바닥을 닦아내며 평탄치 않은 하루의 시작을 예감한다.
어라. 교재에 있는 문제들을 과제로 내려했었건만, 진도를 잘못 적어 두었다. 결국 쉬는 시간, 급히 아이들에게 나눠줄 문제에 인쇄 버튼을 눌렀다. 잘 나온다 싶더니만, 복사기가 멈춘다. 토너 부족이라는 글자에 토너 통을 몇 번 흔들어 다시 넣어 보지만, 몇 장정도 더 나오다 다시 멈춰버린다. 급히 담당 기사님에게 연락은 하였지만, 오늘 수업이 끝나기 전에 나눠 줄 수나 있으려나. 나름 계획한 대로 할 일들을 처리한다고 생각했건만, 생각과 현실이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이 작품, 어려운 거 알아. 그러니까 오늘은 많이 틀려도 혼 안 낼게."
숙제가 너무 어려웠다며 찡찡거리는 아이들에게 호언장담을 하고선 후회가 시작되었다. 같은 설명의 반복에도 엉뚱한 답이 튀어나오는 통에, 입 대신 눈에서 불길을 쏟아낸다. 내가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래, 지켜야지.
"아니........ 이거 앞에서 똑같은 문장 3번 설명하지 않았어?"
주눅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약속이건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었을까.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다 점점 목소리가 높아진다. "혼 안 낸다"는 말이 설명을 듣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심호흡을 여러 차례 내뱉으며 약속을 되새긴다. 화내지 않기로 했지. 참자, 참아.
"혼 안내기로 약속한 거 지금 엄청, 많이, 정말 후회 중이야."
얼굴을 감싸 쥐며 내뱉는 말에 아이들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어느샌가부터 목에서 통증이 올라온다. 목을 감싸 쥐며 수업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할 무렵부터 몽롱함이 번진다. 아, 열이 나는구나.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감기기운 때문에 통증이 왔던 거구나. 감기에 걸렸다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다시 또 걸릴 수가 있나.
곰곰이 감기에 노출되었을만한 상황을 떠올려도, 콜록대는 조카밖에 없다. 조카가 제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연신 이모 입에 물려주던, 요 며칠이 문제였을까. 내 감기가 조카에게 옮아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다시 옮아올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언니, 그 바이러스랑 이 바이러스가 다르다니까."
미안함을 표하던 나에게 여동생은 어린이집에서 이미 그전부터 감기가 유행했다며,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하곤 했었다. 그 말마따나, 다른 바이러스가 들어온 걸까. 요전번에는 코와 목, 그리고 열이 올라 고생을 했다면 이번에는 미열과 함께 몸살기운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맞는 말인가 봐. 다른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다르게 아픈가 봐.
칼칼한 목을 따스한 물로 축이며, 근육통이 올라오는 팔뚝을 조물거린다. 금요일부터 놀러 다녀오기로 했는데, 지금 아프면 2박 3일간의 내 짧은 휴가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병원에 갈 정도의 힘듦은 아닌지라, 약을 사 들고서 집으로 향한다. 부디 이번에는 가볍게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며, 쓰디쓴 약을 넘기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