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들의 흔적을 뒤따르지만, 결국 되찾지 못하였다.
밤이도다.
봄이다.
작은 꽃잎 비의 향연 아래, 자줏빛 인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뒷모습마저 고운,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자국마다 짓이겨진 꽃잎들이 흔적이 되어 남는다.
"우리 할머니 곱다. 안 그래도 고와 신디 더 곱네."
재활을 위해 짧은 걸음들을 옮기는 할머니에게 사다 준 자주색 바람막이가 곱다. 아니, 자줏빛이 잘 어울리는 할머니가 고운 것일 테다. 곱다는 나의 말에 '새 서방이나 얻으러 가카.' 장난스레 말을 건네는 할머니와 함께 웃음을 나눈다. 언제 붙었는지 모를, 어깨 위의 작은 꽃잎을 떼어낸다. 완연한 봄이 세상을 물들인다. 제한적이지만, 조금은 자유로워진 일상들이 이어진다.
천천히 옮겨지던 그 걸음들이 멈췄다. 중심을 잃고 넘어진 할머니는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였다. 다음 주에 있을 병원 진료를 기다리겠다며, 할머니는 통증을 참았다. 할머니의 잠이 깊어진다. 의식이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흔드는 손길에도 할머니는 깨어나지 못했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무거운 구름들이 뒤덮은 하늘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한 할머니의 눈은 여전히 감겨있다. 여러 검사를 해 보아도 이상이 없는, 단순 통증으로 인한 섬망증세라는 판정을 받는다.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퇴원을 종용하는 당직의의 말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깨어나질 못하는 사람더러 퇴원하라는 게 말이나 돼요?"
두꺼운 철문 너머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대기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밖을 나선다. 이미 다 져버렸던, 할머니의 걸음을 수놓았던 그 꽃들이 아직 남아있다. 하얀 흔적들을 따라 걷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잠길 무렵, 할머니를 담당하는 교수가 응급실로 들어선다. 허리뼈에 실금이 가 있다는 판독 결과를 전해 들으며, 할머니의 입원이 결정되었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여러 갈래의 선들이 얽혀 할머니의 손등 위로 이어진다. 진통제와 항생제, 영양제와 수액. 간호사들이 바쁘게 오고 가며 바꾼 액체들이 방울지며 떨어진다. 굳게 감겼던 할머니의 눈이 뜨였다. 하지만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천장만을 응시한다. 굵은 바늘이 불편한 듯, 간간히 뻗는 손을 감싸 쥐며 병원에서의 시간을 다시 시작한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울음소리들이 벽 너머로 전해진다. 옆 병실의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새벽의 형체 없는 인기척들에 할머니가 입술을 달삭인다.
"저기 데려오젠 와신게."
어둠을 향해 뻗었던 손이 느린 곡조에 따라 흔들린다.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노래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떠난 이를 위한 무가(巫歌), 작은 선율과 부드러운 손길로 넋을 위로한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열려있는 문으로 향한 손끝을 따라 시선을 놓는다. 텅 비어있는 복도를 향해 할머니는 이름 하나를 되뇐다. 빨리 오라며 허공을 휘젓는 손길을 따라 주름진 눈매에 눈물이 고인다.
"무사 그디 이시냐. 조끄디 오라. 야, 강 쟈이 불러오라."
할머니의 섬망은 환각과 환청으로 나타났다. 고모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에 들어선 이모할머니는 작은 탄식만을 내뱉을 뿐,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다. 채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얇은 천 위로 스며든다. 어깨를 감싸안는 고모의 손길에도 이모할머니의 어깨가 작게 떨려온다.
"야이 왜 이럼시냐. 왜......"
"병원이라 그래요. 낯선 공간이랑 통증 때문에 섬망 온 거래요. 집에 가면 금방 괜찮아지니까, 너무 걱정 마요."
"게믄 집이만 가믄 되는거라?"
고개를 끄덕이며, 늘 그래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막내 동생의 낯선 모습에 차마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정 사진 앞에서 울부짖던, 끊임없이 눈물만을 흘리던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무사 그디 이시냐. 조끄디 오라. 야, 강 쟈이 불러오라."
(왜 거기 있느냐, 옆에 와라. 야, 가서 쟤 불러와라.)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걸음을 부축하며 들어선 요양 병원의 공기는 무겁다. 비어 있는 침대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이건만 가라앉은 소리들의 사이를 걸어 들어간다. 오랜만에 보는 셋할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에 할머니는 울음을 삼킨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오라방, 나 왔수다. 나 알아지쿠과?"
메마른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보호자용 의자를 할아버지 얼굴 가까이에 놓는다. 조심스레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대화가 끝나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선다.
그렇게 마주한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셋할아버지의 부고에 할머니는 장례식장을 들어서며 무너져 내렸다. 터져 나오는 울음에 내딛지 못하는 걸음을 삼촌들이 부축해 영정 사진 앞으로 이끌었다. 할머니의 울음이 가슴을 찢는다. 흐르지 않는 눈물에도 흐느낌은 멈추지 않는다. 떠나간 오라비를 위한 눈물 외에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셋할아버지 : 할머니의 두 번째 오빠.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남동생이 구해온 휠체어에 앉아 병원을 오다닌다. 길어지는 대기 시간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운 할머니를 위해, 주사실에 양해를 구해 잠시 누울 공간을 제공받는다. 짧으면 30분, 길면 두 시간까지. 딱딱한 침대에 몸을 누이다 진료가 끝날 무렵이면 할머니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잦은 퇴원과 입원이 반복된다. 섬망으로 인해 식사를 거부하며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방안이다. 내딛던 걸음들의 흔적이 사라졌다. 그 위로 덧씌워졌어야 할 발자국 대신, 두 줄의 선이 그어진다. 매끄럽게 구르는 휠체어 바퀴에서 전해지는 작은 진동에도 힘겨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번 시술만 잘 되면, 같이 걸어 다니자.
손잡이를 꼭 쥔 채, 귓가에 속삭인다. 우리는 걸음들의 흔적을 뒤따르지만, 결국 되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