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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지워진 시간과 눈물 어린 시간들이 웃음으로 메워진다.

by 연하일휘 Mar 19. 2025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붉게 물든 시트 위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이 젖어 있다. 기저귀를 버리러 다녀온 잠깐의 시간 동안 흘러내린 핏방울들의 흔적이 낭자하다. 머리맡의 벨을 누르고 할머니의 손을 살핀다. 큰 상처가 난 것은 아닐까, 마주한 장면에 툭- 떨어져 버린 심장이 잔뜩 고동을 친다.


"다행히 바늘을 뽑은 건 아니시네요."


높은 빈혈 수치에 수혈을 하는 중이었다. 시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긴 투병 생활로 기력이 떨어진 할머니의 회복이 더딘 까닭이었다. 잠시 밖을 나선, 2분도 안 되는 시간 사이 할머니가 링거 바늘에 연결된 관을 뽑아 버렸다. 할머니의 손이 아닌, 수혈 팩에서 흘러내린 피들이 방울지며 난간을 타고 흘러내린다. 같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간호사는 갈무리를 해 주고, 수혈이 끝난 뒤에 시트를 함께 갈자며 병실을 나선다.


잔뜩 물티슈를 뽑아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손을 닦아낸다. 양손에 묻은 붉은 흔적들을 여러 차례 닦아내지만, 남은 감촉이 이상한 듯 할머니는 손을 꼬물거린다.


"끈적거려서 그래?"


멍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누가 그거 뽑으래. 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타박을 건네다 웃음이 터져버린다. 놀란 마음에 허망한 이유와 다행스러움이 섞인 탓이다. 나의 웃음이 전염된다. 웃는다. 할머니가 웃는다. 난간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퇴원일이 다가온다.


PixabayPixabay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병원에서부터 시작한 재활 치료는 퇴원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긴 거리를 오다니는 피곤할 법한 여정이었지만, 할머니는 저 혼자서도 재활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걸음을 도와줄 보조 기구를 잡고 거실을 거닐던 할머니의 걸음이 점차 늘어난다. 할머니가 스스로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역할이 분담된다. 아침식사는 작은 아버지와, 점심 식사는 나와 함께. 그리고 저녁식사는 작은 아버지와 내가 번갈아가며 맡기 시작했다.


"셋년 와시냐?"


방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쭉 빠져 있다. 방으로 들어서니 채 마르지 않은 할머니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하마터면 욕실에서 갇힐 뻔했다며 할머니는 저 혼자 웃는다. 침대에 턱을 괴고 바닥에 앉자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은 몸상태도 좋아 혼자 목욕을 해보려 욕조에 물을 받았단다. 따스한 물속에 누워 나른하게 몸을 풀었건만, 일어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더 큰 힘이 들기에, 당연한 결과다. 홀로 끙끙거리다가 일어나길 포기하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욕조에 한참을 앉아 있었단다. 그러다 물이 식어가니 감기라도 걸릴까 물을 다 빼고 나니 그제야 혼자 일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나 올 때까지 좀만 기다리지. 아니면 전화했음 나 오늘 일찍 왔을 텐데."


봄이지만 아직은 쌀쌀함이 감도는 날씨기에 혹여 몸이 식었을까 할머니의 몸을 쓰다듬는다. 이젠 혼자 할 수 있을 줄 알았주. 손끝으로 전해지는 포근한 온기에 안도하며 함께 웃음을 나눈다. 마주한 할머니의 눈동자가 맑다. 흐릿했던, 혹은 늘 감겨있던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생기가 더해지니 참 곱다. 곱디고운 내 할머니다.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냉동실을 여니 허전한 고등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얘 머리 어디 갔어?"


고등어가 머리만 사라진 채 덩그러니 냉동실에 놓여있다. 평소보다 이르게 눈이 떠졌는데, 배가 고파 혼자 머리만 구워 먹었단다. 함께 고등어를 구워 먹을 때면, 머리와 껍질은 할머니 차지다. 그게 가장 맛있다는 할머니와, 그건 입에도 안 대는 손녀가 함께 밥을 먹으니 딱 좋은 조합이다. 그래도 왜 머리만 먹어. 식탁 위에 저 혼자 놓여있을 고등어 머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 친구분이 우미(우뭇가사리)와 냉면 육수를 가져다주었다. 칼질 못하는 손녀임을 알기에 할머니가 우미와 야채들을 다듬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칼날에 재료들이 가지런히 썰린다.


"와, 할머니 칼질 진짜 잘하네."


"느가 못하는 거주."


"너무 맞는 말은 하지 마. 슬퍼지잖아."


함께 웃으며 식사를 준비한다. 별거 아닌 것들에 웃음을 함께 나눈다. 아팠던 시간들은 힘듦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워진 시간과 눈물 어린 시간들이 웃음으로 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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