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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 엄청 때렸는데.

아무리 그래도, '때렸다'는 말은 좀 너무했던 것 같아.

by 연하일휘

흰 종이 위에 그어지던 붉은 선 위에 작은 덩어리 하나가 얹혀 있다. 작은 휴지로 닦아내려 몸을 돌리다 손에 묻어나버리며 붉은 자국들을 남긴다. 아이들의 책을 채점하다 보면 늘 겪는 일이다. 볼펜 똥이라 하는 잉크 덩어리들이 손에만 묻으면 다행인데, 간간이 옷에도 묻어날 때마다 작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숙제를 채점하며 장소에 대한 수업을 이어나간다. 공부를 위한 장소, 놀이와 여가를 위한 장소, 안전을 위한 장소 등. 이미 알고 있는 장소들이 많아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라, 아이들은 신이 났다.


"저 어제 박물관 갔어요."


"나 어제 미술관도 갔는데."


아이들과의 대화 도중, 한 아이의 입에서 여러 차례 말이 맞지 않는 문장들이 나열된다. 학원 끝나고 다녀오기에는 분명 시간이 맞지 않을 터인데, 거짓말과 과장이 섞인 말들에 잠시 고민에 빠진다.


"어제 진짜 다 갔다 왔어?"


"네?"


다시 되물어볼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잠시 손을 멈추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니, 슬쩍 눈을 피하고 만다.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신이 나서 과장이 섞인 말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짧은 침묵 끝에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어제는 안 갔어요......"


"혼내려는 거 아냐, 00이가 하는 말 듣다 보니까 궁금해져서 물어본 거야."


"네에...."


"예전에 엄마 아빠랑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다 다녀온 거지?"


"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주의를 준다. '말'이라는 것이 잘못 전달되면,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거짓말'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린 마음에 아는 내용들에 신이 나 작은 과장을 섞는 것이었겠지만, 오해로 인한 억울함을 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면, 고민이 많아진다. 아동심리학이라도 공부를 했어야 하나. 섣부르게 이야기를 하다 상처를 줄까 봐, 혹은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게 될까 봐. 걱정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동 학대 신고 1577-1391]


초등학교 주변에 노란색 표지판에 적힌 글귀를 보고 한 아이가 질문을 했었다.


"아동 학대가 뭐예요?"


"아이를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하는 행동들을 말해. 누가 너를 때리거나 괴롭히면 저 번호로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할 수 있어."


"나 아빠 신고해야겠다. 어제 아빠가 나 엄청 때렸는데."


8살짜리 아이의 말에 멈칫,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내가 아는 아이의 부모님은 손찌검을 하거나 하는 분은 아니었는데. 불과 며칠 전에도 아빠와 둘이서 낚시를 하러 다녀왔다며 잔뜩 신이 났던 아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단편적인 면모만으로는 섣부르게 결론지을 수 없는 일이라서 조심스레 말을 이어간다.


"아빠가 00이를 때렸어?"


"네. 동생이랑 놀고 있는데 와서 막 나 괴롭혔어요."


"어떻게 괴롭혔는데?"


"막 나 갖고 노는 장난감 뺏어가고. 뽀뽀한다더니 깨물고. 덥다는데도 계속 안고 있고. 동생한테는 안 그러면서 맨날 나만 아프게 하고 괴롭혀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의 말을 듣다 보니, 동생과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함께 놀자고 다가왔나 보다. 집중하고 있던 터라, 아빠의 애정표현이 아이는 귀찮게 느껴지고, 괴롭힘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시기, 엄마와 아빠가 많이 바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아마 아빠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이 적다 보니, 함께 있는 시간만이라도 잔뜩 애정을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이의 시큰둥한 반응에 속상했을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빠 때문에 많이 속상했구나. 근데 아빠가 진짜 때리기도 했어?"


"몰라요."


아이는 말을 멈춘다.


학부모님과 꽤 오랜 시간을 교류했다는 원장님께 대화 내용을 전달하고, 대신 상담을 부탁드렸다. 바쁜 엄마아빠에 대한 서운함이 작은 과장과 뒤섞이며 터져 나온 것만 같아서. 상황을 잘 모르는 나보다는 원장님이 더 잘 대응해 주시리라는 믿음이었다. 이후로는 아이의 입에서 아빠에 대한 원망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전달받고 미안함이 더 커진 것인지, 엄마아빠와 함께 놀러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아이의 입에서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참 순수하다. 하지만 때때로 감정이 과잉되며 튀어나오는 말들에 과장이나 거짓이 섞여 있기도 한다. 자칫 악의적인 말들로 받아들여지지만, 감정을 배워가고 말을 배워가는 시기이기에 잘못된 단어 선택들로 인한 경우가 더 많았었다. 순수한 말이기에, 더 고민해야 하는 말들.


근데 쌤이 아무리 생각해도 '때렸다'는 표현은 좀 너무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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