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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자 치코와 에띠가 푹푹

네 얼굴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아.

by 연하일휘

내려앉은 햇빛의 온기가 바람에 쓸려간다. 찬 바람도 한몫을 하겠지만, 이른 아침이기에 옅은 빛이 품은 온기가 적은 탓도 있을 것이다. 조카를 카시트에 앉히며 먼 곳의 나들이를 하는 날. 커피 한 잔씩을 손에 쥐고 출발한다.


"에띠! 뜨럭!"


조카는 굴착기와 트럭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더니 신이 나 소리를 지른다. 굴착기를 '에띠'라고 부르며 요즘 가장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이다. 굴착기가 흙을 퍼 트럭에 옮겨 담는 것을 보며 '푹푹'이라는 의성어까지 넣어가며 손동작으로 따라 한다. 외출의 즐거움에 하나의 행복이 더해진 조카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기분좋은 시작이다.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익숙한 풍경들을 마주한다. 저 사거리에서 핸들을 꺾으면 할머니가 쉬고 계신 곳이다. 자연스럽게 제부와 나의 입가에서는 할머니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애기가 그때 딱 한 번 할머니 보러 가고, 그 이후로 안 가봤지?"


"그쵸. 날 좀 풀리면 둘이서라도 다녀오려구요."


"할머니 살아계셨으면 진짜 예뻐하셨을 텐데. 태몽도 먼저 미리 꾸셨잖아."


"맞아요. 자주 물어보기도 하셨었는데."


여동생이 결혼을 하고, 할머니댁 2층에 살림을 차렸었다. 제부도 자주 할머니와 식사도 하고, 말벗을 해 드리며 예쁜 손주사위 역할을 톡톡이 했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여동생의 태몽을 꿨다는 말을 했었다. 자주 소식을 물어보며 기다리던 할머니는, 결국 증손주를 보기 전에 떠나셨다. 결혼 이후 할머니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제부도 많이 힘들어했던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찾아온 아기 소식에 여동생은 할머니가 꾸었다던 태몽이 자꾸만 생각이 났더란다. 할머니가 먼 곳에서 준 선물을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더 소중하고, 더 예쁜 아가.


'아쿠아플라넷', 제부는 작년 이맘때쯤 조카가 잔뜩 빠져든 공간이었기에 다시 오고 싶었다는 말을 꺼낸다. 물고기들을 보며 반짝이던 그 눈동자가 너무 예뻤단다. 도착시간과 공연 시간이 맞물리며, 공연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해녀, 망사리의 모험" 현란한 조명과 음악, 흩뿌려지는 물. 다이빙을 하며 이는 물보라에 조카의 시선이 바빠진다. 할머니의 목소리로 사투리와 표준어가 혼재된 대사를 들으며, 조카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급히 시선을 돌린다.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것이 엊그제인데, 언제 이리 커 버린 건지. 내 새끼도 아니건만, 주책이다 정말. 이건 아마 할머니 목소리가 떠오른 탓일지도 모른다.



ⓒ 연하일휘



바다사자 치코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카가 몸을 앞으로 쭉 빼어든다. 집에서 종종 제 몸만 한 물개 인형을 들고 다니는 녀석이기에 더 푹 빠져든다. 간식을 먹고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안녕, 안녕.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치코가 박수를 칠 때면 따라 박수를 치고. 마지막 '경례' 포즈까지도 야무지게 따라 한다. 공연장을 나서면서도 치코에 대한 애정을 짧은 단어들로 잔뜩 표현한다.


수족관 안을 유영하는 작은 상어를 본 조카가 고개를 돌려 이모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아닌데, 아기 상어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 그런 의문을 품은 얼굴이다. 펭귄도 보고, 수달도 보고, 거북이를 보며 높아진 목소리로 '엉금엉금'을 외친다. 그러다 바다사자를 마주하고선 까치발까지 하며 넘치는 애정을 드러낸다.




ⓒ 연하일휘




조금 더 천천히 구경하기를 바라는 제부의 마음과는 달리, 신이 난 조카의 발걸음이 빠르다. 메인 수조 앞에서 감상을 해보려 했건만.


"아빠. 배고파요."


평소라면 '밥' 혹은 '맘마'라는 단어로 의사를 표현했을 텐데, '배고파요'라는 말은 언제 배운 걸까. 제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조카를 번쩍 안아 들고는 바로 식당으로 향하고 만다. 잔뜩 뛰어다닌 데다 배까지 부르니, 작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졸려하는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오늘 재밌었어? 우리 오늘 뭐 봤지?"


"에띠! 푹푹!"


"맞아, 에띠도 보고. 우리 치코도 봤지. 엉금엉금이랑 상어도 보고."


"에띠! 치코!"


많은 것들을 보고 즐긴 조카의 머릿속에는 출발하면서 보았던 '에띠'(굴착기)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모양이다.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이모도 그래. 이모도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네 얼굴만 기억에 남더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물개 인형을 안고는 '치코, 치코'라며 오늘 본 것들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언젠가 제부가 했던 말. 이 시간들이 아이에게는 잊히겠지만, 그래도 자기 기억에는 남는다는 말. 이제야 온전히 다가온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네 그 밝은 웃음만은 이모에게 남아 있을 테니까. 전해질테니까.



ⓒ 연하일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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