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것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차가워진 살갗 위로 두툼한 이불을 끌어올린다. 8시라고 적혀있는 핸드폰 액정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 포근함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온 아침, 그리 긴 수면시간을 취한 것도 아닌데.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새벽 2시라는 숫자였다. 6시간 정도면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피로가 쌓였던 날들에 대한 몸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평균 수면 시간은 4시간. 이번 주는 내내 수면부족에 시달렸었다. 주말을 모두 휴식에 썼다면 모를까, 토요일도 이른 아침부터 조카가 잠들기 전까지 함께 외출을 하고 육아를 도와주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토요일 저녁부터 바닥으로 가라앉는 몸 상태에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했다. 일주일간의 피로가 일요일 하루로 몰아칠 것만 같은 예감. 덕분에 '미안'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하며, 일요일의 휴식 시간을 확보했다. 결국 오늘의 아픔은 이미 예견된 결과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이불과 한 몸이 되었건만, 두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햇빛이 제 힘을 잃어갈 시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조카를 보러 갈 준비를 한다. 여느 때라면 몸이 좋지 않을 땐 조카를 만나는 것도 밀어둔 채 휴식을 취했겠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제부가 조리원에 있는 아내와 둘째를 보러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간. 마지막 도움을 주는 날이다.
"언니, 매번 고마워."
"내일만 해주면 끝인데 뭐. 미안해하지 마."
여동생은 저녁마다 조카를 돌봐주는 것에 미안함을 표현한다. 조리원을 퇴소하고 난 뒤에는 여동생과 제부도 모두 집에 있을 테니, 도움을 주는 것도 어차피 이번 주말이면 마지막이다. 그런데 내 말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들렸는지, 여동생은 '끝'이라는 단어에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어... 그래도 애기는 보러 올 거잖아?"
"당연하지. 이젠 애기 돌보러 가는 게 아니라 놀아주러 가는 걸로 바뀔 거잖아."
여동생은 작게 웃는다. 조카바라기 이모가 갑자기 휙 바뀔 리가 있나.
집으로 들어서니 조카에게 밥을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는 제부의 고군분투가 펼쳐지고 있다. 이모가 숟가락을 들어도 두어 입 정도만 더 먹을 뿐, 먹기 싫다며 잔뜩 짜증을 부린다. 이따가 우유도 좀 먹이고, 간식이라도 먹여둘게- 엄마가 없는 요즘, 밥투정이 심해졌다. 식사 대신 다른 간식들로 배를 채우는 건, 아기들 식사 교육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는 안다. 하지만, 엄마가 없고 아빠도 외출하는데. 이모랑만 있을 때만 발휘되는 융통성이다.
미지근하게 데운 우유도 몇 입 먹더니 밀어내버리고, 과자도 이모와 할머니 입에 대신 먹여준다. 어디 아픈가. 이마를 짚어도 열은 없는데, 애가 식욕이 도통 없다. 그리고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장난감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괜히 짜증을 부리다 울음을 터트려 버린다.
"오늘 왜 이렇게 앵앵거릴까, 앵앵이 되려고 그러나? 앵앵?"
그 발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앵앵'이란 말을 따라 하다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방싯방싯 웃는 것을 보니, 그새 마음이 풀린 모양이다. 작은 손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만, 갑자기 기저귀를 쭉 잡아당긴다. 그리고 제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치며, 이모를 빤히 바라본다.
응아 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기저귀를 확인해 보기도 전에, 바지에 이미 노란 물이 배어있다. 설사를 했다.
"우리 똘똘이는 응아도 잘하고, 이모한테 말도 잘하고. 너무 예쁘네~"
엉덩이를 씻겨 주는 사이, 조카가 '아파'라는 단어를 계속 반복하며 엉덩이로 손을 가져간다.
"아파. 아파. 연고."
이모가 봐볼게- 항문 주변이 빨갛게 부어있다. 아마 설사를 한 탓일 테다. 제부에게 전화를 걸어 발라야 할 연고를 찾고 조심스레 발라주니 그제야 기저귀로 두 발을 뻗는다. 제부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빠가 왔다며 잔뜩 신이 나 품으로 달려드는 조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아빠와 바톤 터치를 하고 집으로 올라와 다시 이불 위로 쓰러진다. 아- 맞네. 나 아팠지. 정신없이 조카를 돌보느라 내가 아픈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지끈거리는 두통이 다시 느껴진다.
주말이 지나간다. 정신없을 일주일이 눈앞에 그려지니, 작은 서글픔에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엄마가 돌아와 잔뜩 신이날 조카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며 몇 주 만에 엄마 품에 안기는 녀석이 질러댈 행복한 비명이 귓가에 선하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