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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기억을 연결하다.

그 꽃은 불안감 위에 잠시 숨을 고르는, 머무르는 시간을 건네주었다.

by 연하일휘

밤이란 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모습을 덧씌운다. 밝은 빛 아래에서 선연히 드러나던 것들이 가려지고, 새로운 필터 하나를 갈아 끼운 듯, 군데군데 묻어난 어둠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도 아름답지만, 까만 하늘 아래에서 조명 불빛에 의지한 풍경도 놓칠 수 없는 하나의 매력이다.


그렇기에 봄이면 밤의 벚꽃을 기대한다. 자정이 다 되어가던 그 하굣길, 횡단보도 아래에서 마주한 밤의 벚꽃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 탓이다. 수험생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해가 뜰 때 집을 나서, 달이 한가운데 뜰 때쯤에서야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 공부의 압박감 속에서 발견한 밤의 벚꽃은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힘들었고, 더 힘들 예정이었던 그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빛나던 그 꽃은 불안감 위에 잠시 숨을 고르는, 머무르는 시간을 건네주었다.


그때의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 긴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변해있었지만 그럼에도 벚나무들만은 여전하다. 아니, 그때는 단 한 그루의 벚나무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조금 더 여유롭게 벚꽃길을 걷게 되었다. 선선한 밤의 공기, 많은 사람들이 걷는 그 흐름 속에서 나 홀로 멈춰 서서 밤의 벚꽃을 감상한다.



638159881772023082_0.jpg ⓒ 연하일휘



한창때의 벚꽃이 아닌, 이미 벚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힘없이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사진을 찍는 이는 나 혼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 길을 걷듯, 별다른 감탄도 없이 흥겨운 발걸음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며 내가 조금 늦었음을 실감한다.


원래 늦는 아이인데, 그래도 이번에는 채 다 지기 전에 보러 왔으니. 나의 기준으로는 늦지 않은 시기지만.


빛을 받은 벚꽃들은 저 스스로 빛을 내는 양, 흰 빛이 더 도드라진다. 한낮의 벚꽃이 저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수많은 꽃들이 얽히며 불분명한 경계가 지어진다. 하지만 밤의 벚꽃은 빛과 어둠의 대조 속에서 오히려 꽃들의 경계가 선명해진다. 그러다 조명이 어두운 길목에 들어서면 작은 탄성을 자아낸다. 빛이 어두운 곳에서의 벚꽃은 멀리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제야 작은 빛을 품은 벚꽃을 발견할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꽃이 더 아름답다.



638159882023508096_0.jpg ⓒ 연하일휘



나무 아래에서 벚꽃을 바라보다 그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뽑는다면,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벚꽃이 아닐까. 까만 배경에 하얀 꽃잎들, 혹은 분홍 꽃잎들이 얼기설기 모여 만든 지붕은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게 만든다.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를 옮기려 했을 때, 어지러움을 느낀다. 밤의 벚꽃에 취해 너무 오랫동안 바라본 모양이다.




638159883018292605_0.jpg ⓒ 연하일휘



얼마나 오래된 나무일까. 나무 한 그루를 사진에 담으려 뒷걸음질을 한참을 해야 했다. 이 나무가 원래 이렇게 컸던가, 다른 계절에 종종 찾아왔던 이곳에서, 꽃이 핀 이후에야 나무의 크기와 나이를 가늠한다. 가지치기를 하기보다, 그저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란 듯한 나무는 이유 없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내가 뿌듯함을 느낄 일이 아닌데도, 인위적인 사람의 손길을 피한 세월의 흐름이 기쁘다.


만개한 벚꽃은 이제 힘없이 꽃잎 한 두 개를 흩날린다. 한창때와는 달리, 꽃잎들이 힘을 잃은 듯, 더 연약하게 느껴진다. 몇몇 가지에서는 채 파란 잎이 돋기도 전에 이미 꽃잎이 다 져버리기도 한. 조금 강하게 부는 바람에 내리는 벚꽃비는 아름답지만, 조금씩 비어 가는 가지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흰색과 검은색, 흔하디 흔한 색의 조합이지만. 적어도 이때만큼은 흔치 않은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작은 욕심이 생긴다. 아니, 작지 않을지도. 혹은 잘못된 욕심일지도. 고등학생 시절, 운동장 한 구석에 핀 벚꽃을 따서 교과서 사이에 끼워 넣어 말리곤 했었다. '밤의 벚꽃'을 보러 가며 당시의 기억이 함께 이어진 걸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욕심을 내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다. 이번 딱 한 번만. 오랜만에,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딱 한 번만. 잘못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연이으며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미 연약해진 꽃들은 책 사이에 끼워 넣으며 이미 몇몇 꽃잎을을 잃기 시작해, 아쉬움이 커졌지만 말이다.


638159883884473927_0.jpg ⓒ 연하일휘




- 이미 져 버린 벚꽃을 보러갔던, 그 어느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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