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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Mar 16. 2021

냉이의 시간

우리 엄마가 하는 일

실과 시간(초등 교과목에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고, 실험과학의 줄임말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됨)에 가족 구성원과 집에서 역할분담에 대해서 썼는데 아빠는 여름이 산책과 유머, 엄마가 하는 일은 당근 마켓에서 물건 싸게 사기와 냉이 캐기라고 적었다고 해서 완전 빵~~~!!! 터졌다.


맞다. 너무나 맞다. 당근은 좀 시들해졌지만, 냉이는 정확하다. 딸이 엄마가 하는 일은 냉이 캐는 일이라고 적어낼 정도로 설 쇠고 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꼬박 한 달 동안 틈만 나면 냉이를 캐고 있다.


나의 봄은 냉이를 캐면서 시작했다. 이 동네에 와서 처음 맞는 봄이라 냉이 서식지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몇 군데 중요 스폿(농약 안 치고, 밭도 안 갈고, 거름기가 많고, 너무 해가 쨍하지 않은 곳)을 발견했다.


보통 밭둑에 냉이가 많다. 요즘엔 봄 농사 준비하러 많이들 나와 계셔서 밭주인에게 물어보고 캔다. 대부분의 밭주인들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로 날 보고 젊은 사람이 냉이를 캐러 다니냐며, 기특해하면서 많이 캐라고 허락해준다. 그렇게 젊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꾸하기 시작하면 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냉이 캐는 시간이 줄어들어 그냥 넙쭉 절하고 들어가서 묵묵하게 냉이를 캔다. 지금까지 딱 한 분(지역에선 꽤 알려진 소설가로, 그분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잘 안다)만 들어오지 말라며, 안 된다고 했다. (그냥 안 된다고 하면 되지 정색을 하며 호통을 치셔서 서럽고 무서웠음!!!)


나는 냉이 캐기에 적합한 천부적 신체조건을 타고났고, 조기교육까지 받은 데다 아주 숙련된 노동자다. 키도 크지 않고 하체가 튼튼해서 쪼그려 앉는 자세를 해도 한두 시간은 끄떡없다. 지방 소도시 언저리에서 자랐는데 작은 텃밭을 일구던 할머니 손에 이끌려 어릴 때부터 밭에서 냉이 캐며 놀았다. 무엇보다 나는 냉이 캐는 게 너무나 재미있다. 냉이는 어쩜 생긴 것도 예쁘고 냄새도 좋을까. 냉이를 캐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 번은 해가 진 줄도 모르고 냉이를 캐다가 밭주인 할아버지가 어두워졌다고, 이제 집에 가라고 재촉해서 억지로 일어났다. 그렇게 캐다 말고 집에 오면 자다가도 냉이 생각에 잠을 설친다. 그만큼 난 냉이에 진심이고 열심이다.

 

울긋불긋 자주빛 겨울냉이들


그럼, 그 많은 냉이를 누가 먹느냐. 물론 내가 제일 많이 먹는다. 뿌리는 생으로도 씹어먹고, 데쳐서도 먹고, 한 번은 된장에, 한 번은 고추장에 무쳐 먹고, 국도 끓여 먹는다. 운 좋게도 나와 같이 살고 있는 남편과 딸도 좀 얻어먹는다.


데치면 자주빛은 사라진다


그다음부터는 철저하게 선물용이다. 산삼보다 더 좋다고 할 정도로 겨울 냉이가 좋아서도 그렇지만, '냉이=봄'이기에 봄의 맛과 향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아무에게나 주는 건 아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신세 진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 주기도 한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마침 만나게 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는데 내 나름의 조건이 있다.


일단 가까워야 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물론 심리적인 거리도 가까워야 한다. 이런 경우 아침에 냉이를 캐서 낮에 다듬고 씻어서 저녁에 해 먹을 수 있도록 바로 가져다줄 수 있다. 진짜 산지직송+당일배송=제로 마일리지. 가깝기만 해서도 안 된다. 냉이를 좋아하고, 특히 노지 냉이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냉이를 선물로 주는 건 단순히 먹을 것을 나눠 주는 게 아니다. 시중에 가면 노지 냉이 한 봉지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다. 내가 냉이를 누군가에게 보내는 건 냉이를 통해 구체화된 봄이라는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보내는 일이다. 냉이를 캐는 게 아무리 좋아도 고단한 일이긴 하다. 봄볕에 얼굴 그슬리고 봄바람을 맞고 모래 씹어가며 냉이 서식지를 찾아 수없이 헤매야 하고, 캐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다듬는데 그 몇 배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냉이를 선물할 때는 다듬고 씻어서 바로 요리할 수 있게 준다. 그렇게 누군가를 생각하며 정성을 쏟는 그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다.


추운 겨울에도 곧게 뻗은 뿌리(엄마 말이 날이 추우면 뿌리가 더 길어진다고)


가끔은 냉이 캐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친구들은 냉이 밭으로 불러낸다. 이렇게 밭에서 봄볕에 얼굴 그슬려 가며 한바탕 수다를 떨면서 냉이를 캔다. 이때 내가 캔 냉이는 그 친구에게 몰아준다. 나는 숙달된 노동자라서 또 캐면 된다. 친해도 안 주는 친구도 있는데 고향, 친정, 시댁이 시골인 사람들은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아무래도 후순위로 밀린다.


보통은 생냉이로 준다. 자줏빛 겨울 냉이의 색깔과 흙냄새 나는 냉이 향을 함께 주고 싶어서다. 하지만 바빠서 시간이 없거나, 여력이 없어서 요리를 못하는 친구에게는 아예 무쳐서 가져다 주기도 한다. 보통 냉이 한 봉지도 다듬고 데쳐서 무치면 한 접시가 될 똥 말똥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냥 생으로 준다.  



이 모든 것에서 예외인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나에게는 여느 지방 도시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강남에 사시고, 냉이 사진을 보내주니 '와, 예쁘다. 근데 어느 부분을 먹는 거야?'라고 되묻고, 냉이가 어디에서 자라고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마트에서 파는 냉이와 구별도 못 하는데도 그냥 주고 싶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았지만 몇 살인지 정확히는 몰랐는데, 올해 오십이 된다고 했다. 앞자리가 바뀌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회춘 기념 냉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에게 나는 받기만 했다. 내가 잠수를 타도, 내가 내킬 때만 전화를 받고 카톡을 확인하면서 내가 아쉬울 땐 몇 시간씩 붙들고 있어도 늘 내 곁에 있어줬다. 냉이는 어느 부분을 먹느냐는 그녀를 위해 처음으로 냉이 3종 세트(부침용 생냉이, 냉이무침, 냉잇국)를 출시했다. 아이스박스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엄마 된장과 묵은지도 함께 넣었다. 늘 받기만 했는데, 나도 뭔가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행복한 봄이다. 한 달 동안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던 냉이에 꽃이 피고 있다. 이렇게 냉이의 시간은 가고 쑥의 시간이 오고 있다.


냉이는 꽃이 피면 못(안)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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