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사하고 노브라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by 무엇이든 씁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딸이 굿나잇 인사 대신 이 말을 투척하고 자러 갔다. 한번 들었을 뿐인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느낌까지 그대로 카피할 정도로 나는 이 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딸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말인 줄 알고, 오~천잰데! 하며 혼자 뿌듯했다.


그런데 이런,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이 만든 말이 아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에 나오는 대사로 이누야사 짤, 가양이 짤이라고 불리는 레전드 짤이었다. 퇴사하면 단톡 방에 이 짤을 투척하고 나간다고 해서 일명 퇴사 짤이라고 불리며 유명해졌다고 한다.(일찍 알았더라면 나도 투척하고 나오는 건데~~ㅎ)



나는 퇴사와 함께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이누야샤 짤은 퇴사하는 마음에도 딱이지만, 브라를 벗어던졌을 때 더욱 찰~~~ 떡이다. ‘행복’을 ‘자유’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진짜 말 그대로의 ‘자유’를 느꼈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속이 후련했다.


노브라로 사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출산 후 육아 휴직하고 3년 가까이 모유수유를 하면서 노브라로 살았다. 난 노브라로 살 거야! 이렇게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자연스럽고 편해서 점점 그렇게 된 거였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끝내고 입사 후 다시 요요현상이 왔다. 역시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점진적으로 그랬다. 처음엔 노브라를 패션으로 커버하고자 애썼다. 레이어드룩으로 옷을 겹겹이 겹쳐 입거나 조끼, 프릴 달린 옷, 각종 스카프를 이용했다. 이는 더워서 얼굴이 벌게져도 옷을 벗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다 봄이 오고 켜켜이 겹쳐 입은 옷을 하나씩 벗게 되고 스카프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스포츠 브라로 바꿨고, 홑겹도 더운 여름이 되면서 와이어 없는 브라로 바꿨다가 점점 옷에 신경 쓰고, 옷을 핏(fit)하게 입게 되면서 와이어 있는 브라로 바꿨다.


매일 아침 훅을 채우는 순간, 그야말로 굴레와 속박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명치는 콕콕 쑤시고 아팠고, 뭘 좀 먹었다 하면 체했다. 사이즈 큰 걸로, 편한 걸로 바꿔도 가슴은 늘 답답했다. 심할 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만성 소화불량, 위염이었다. 가끔 화장실에 가서 브라를 풀고 쉬다 오고, 야근할 땐 브라를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점퍼를 입고 집업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훅부터 풀었고 집에 오자마자 브라부터 벗어던졌다. 휴가는 꼭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노브라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어서였다. 나도 남의 시선 의식 안 하고, 남도 내가 뭘 입던 관심 없는 곳에서 큰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노브라가 되었다. 그동안 사용해왔던 각종 브라들을 다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해외에서처럼 완전한 해방은 아니다. 노브라에 맞는 패션 코디로 커버하고 있다. 일단 겨울이 제일 편하다. 겹겹이 두꺼운 옷 때문에 노브라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봄가을엔 맨투맨이나 스카프로 해결한다. 여름엔 점프슈트나 뷔스티에 원피스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다. (뷔스티에가 원래 브라+코르셋인데 노브라를 위해 뷔스티에라니... 아이러니ㅋㅋ) 선택의 폭이 대폭 줄면서 옷 입기가 매우 편하다. 그 좁은 선택지 중에서도 제일 편한 옷을 반복해서 입다 보니 단벌숙녀, 유니폼처럼 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옆집 아이가 와서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고 물었던 적도 있다. 노브라에는 이 옷이 편해서 자꾸 입게 된다고 했더니 아아... 그렇구나, 하면서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많이 당황한다. 애나 어른이나 아직 노브라를 보는 시각이 아직은 이렇지만, 적어도 동네에서라도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니 세상 편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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