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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pr 23. 2021

쑥의 시간

달콤 쌉싸름한 시간들

매일 아침 쑥을 씻어서 채반에 받혀둔다. 옛날에 매일 아침 정화수 떠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간소하지만 정갈한 의식과도 같은 매일 아침 나의 루틴이다.


쑥과 쌀가루가 만나면 때 아닌 화이트 크리스마스!


찜솥은 늘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다. 누가 놀러 오면 바로 불을 켜고 물이 끓는 동안 미리 씻어서 물기를 빼놓은 쑥과 미리 준비해놓은 쌀가루를 버물버물 버무려서 찜솥에 올려 10-20분만 찌면 쑥버무리가 된다.


“이거 뭐예요? 떡이에요?”


아마도 나의 가장 어린 친구일 친구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90년생, 서울 강남에 사는 남자라는 인구통계학적 스펙으로는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가 보다.


“맛은 어때요?”


비주얼에서 일단 감동했고, 새로운 맛인데 취향저격이라고 했다. 쌀가루가 하얗게 뿌려진 생김새나 조금씩 뜯어먹는 방식이 독일의 크리스마스 빵, 슈톨렌 같다며 카페에서 팔아도 좋을 거 같다고 했다. 이거 칭찬인 거죠?


방금 쪄낸 쑥버무리


어쩌다 보니 젊은 친구에게 극찬을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쑥버무리는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좋아한다.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 맛과 향이 뼈속까지 건강해질 것 같은 쌉싸름한 맛까지 그립고 바라는 것들을 대략 충족시킨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울 엄마, 아버지에게는 생쑥을 한 박스 보내드렸다. 올해 여든아홉 되시는 뒷집 할머니에게 한 솥 쪄서 드리고, 백신 접종을 앞두고 걱정이 많은 친구 어머님께 쪄서 보내고, 부산이 집이지만 손자 손녀 돌보느라 서울에 올라와 계신 후배 어머니께도 쪄서 보냈다. 그리고 생물학적 노인은 아니지만 내가 독거노인이라고 놀리는 싱글 선배가 50살 기념 단식을 했다고 해서 한 솥 쪄서 보냈더니 감동의 메시지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그러려고 보낸 건 아니구...라고 말하지만 이미 쑥부심ㅎㅎ


그렇게 우리 집에는 매일 쑥향이 퍼지고 있다. 그리고 산과 들에는 쑥이 쑥쑥 자라나고 있다. 납작해진 내 마음도 쑥쑥 자라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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