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그 중간쯤

배롱나무의 봄

by 무엇이든 씁니다

비가 그쳤고, 주위가 점점 밝아졌다. 내 눈은 늘 향하던 그곳을 향해 있었다. 앗! 저 색은 지금 계절에 잘 볼 수 없는 색인데. 막 돋아난 새순에서만 볼 수 있는 빛나는 연두색이었다. 마침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를 불러 세웠다.


할머니, 배롱나무 산 거 아니에요?

_응, 죽은 줄 알았는데 이 짝(쪽)은 용케 살아서 이렇게 나왔어. 저짝(쪽)은 죽었고.

와! 너무 다행이에요. 이쪽이 남쪽이라 해를 많이 받아서 살았나 봐요.

_그 짝(우리 집)은 어떻게 됐어?

저희 집은 아직이에요. 그래도 할머니 나무가 살았으니까 좋아요!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가 살아났다. 아주 일부분이지만, 그래서 더욱 경이롭다. 죽음을 뚫고 나오는 특별한 생명력과 힘을 느낀다. 나의 힘든 시기에 거기에서 말없이 위로하던 배롱나무의 죽음 앞에 무기력해져서 내 마음속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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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를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나무는 동일한 것이 없다.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 삼거리 집 배롱나무에 새잎이 난다고 뒷집 할머니 배롱나무에도 새잎이 나는 것이 아니고, 뒷집 할머니 배롱나무가 살았다고 우리 집 배롱나무가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애태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공을 들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나무는 우리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에 따라 살고 죽는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의 경계도 모호하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다시 시작되고, 죽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살아나고, 잘 사는 것 같다가도 어느 찰나에 죽는다. 어쩌면 나무에게는 순환이 있을 뿐 절대적 죽음, 절대적 종말이란 없을 지도 모른다.


새순이 돋아나는 배롱나무


우리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 때는 그 시간에 예속되어야 한다. 그 시간이란 아득하고 불확실해서 기다림과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 불확실성을 참고 기다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조금 특별한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도시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세계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죽은 줄만 알고 자책했다. 내가 너무 무거운 마음을 올려놔 그런 게 아닐까, 내가 너무 과도하게 기대어 그런 게 아닐까. 살아 돌아온(아직 죽지 않았던) 배롱나무를 보며 다짐한다. 너무 과도한 의지와 기대, 넘치는 찬양과 숭배 없이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바라볼 거라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옆에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