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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un 17. 2021

상추 절대 심지 마라

얻어먹으면 더 맛있다

올해 우리는 상추를 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 냉장고에는 상추가 풍년이다.


처음 텃밭 농사를 지을 땐 우리도 상추를 꼬박꼬박 심었다. 하지만 무섭게 자라는 상추를 다 먹을 재간이 없었다. 상추를 뜯어도 뜯어도 계속 자랐다. 도저히 혼자는 못 먹겠고 이웃들과 좀 나눠 먹으려고 했더니 다들 상추를 반기지 않는 게 아닌가. 다들 텃밭을 하거나 가까이에 텃밭을 하다보니 여기저기 상추가 흔했던 것이다(상대적으로 귀한 가을 상추는 환영받는다). 하다 못해 어린이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상추 농사를 지어 고사리손에 상추를 들려 보냈다. 그렇게 상추 쓰나미에 혼쭐이 난 후 상추를 심지 않았다.


그래도 한두 포기라도 심을 걸 그랬나, 당장 아쉬울 땐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역시 그러지 않길 너무 잘했다. 여기저기서 상추 가져가라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뒷집 할머니는 물어보지도 않고 수시로 상추를 뽑아 안긴다. 그렇게 받아놓은 상추를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어서 또 나눠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공중 부양을 하는 자들(아파트 거주자), 채식주의자, 다이어트 하는 친구들이 상추를 반기길래, 그럼 이왕 하는 거 적극적으로 상추를 얻어다 나눠주는 중간 유통상 노릇을 하고 있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형광색 줄기를 자랑하는 적근대, 적상추, 치커리, 적치커리, 청상추, 로메인 상추, 래디쉬


샐러드로 먹고, 나물로도 먹고, 상추 핑계로 고기도 구워 먹었지만 상추가 아직 남아있다. 상추를 아무리 좋아해도 매일 똑같이 먹을 순 없다. 얻어온 상추를 알뜰히 먹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상추로 할 수 있는, 가능한 상추를 많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봤다. 그중 가장 신선했던 게 상추 물김치와 상추 밥이다. 근데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먹어본 적도 없고, 레시피만 보고는 그 맛이 도저히 상상도 안 되니까 아직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상추 밥을 오늘 저녁에 해볼까, 생각 중이다.


암튼 오늘의 결론은 상추 절대 심지 말라는 것. 상추 심는 대신 가까이에 텃밭 농사짓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없으면 지금 나가서 사귀면 된다. 초보 농사꾼도 괜찮다. 초보 농사꾼일수록 상추를 잔뜩 심아서 주체를 못하는 거 많이 봤다. 얻어먹는 사람은 공짜로 얻어먹어서 좋고, 나눠 주는 사람은 부담없이 팍팍 나눠줄 수 있어서 좋다. 우리가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주거나 부담없이 받기가 쉽지 않은데 상추는 그게 된다. 그래서인가 얻어 먹는 상추가 더 맛있고, 그니깐 상추는 얻어먹어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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