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Jul 22. 2021

#12. 퇴사 후 어슬렁

동네 한 바퀴 돌기

윤석중 시인이 가사를 붙인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동요가 있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우리 보고 나팔꽃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며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어쩜, 요즘  일상이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바퀴를 돈다. 우리집 바둑이, 여름이도 같이 돈다. 돌다 보면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이 인사한다. 매일 매일 피는 꽃이 다르고 일일이 열거할  없을만큼 많은 꽃이 피는 봄과 달리  여름에는 꽃이 귀한 편이지만 그래도 해바라기, 나리꽃, 백일홍, 벌써 코스모스, 그리고 목백일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배롱나무 꽃이 인사를 한다. 언뜻 보면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에 바짝 붙어서 보면 보이는 수줍은 대추나무 꽃도 있는데, 꽃이  곳에 콩알 만한 대추가 달리고 있는 중이다.



걷다 보면 작은 것들이 보이고, 작은 변화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예전에도 걷기가 이동을 위한 것이고 최단거리를 찾아 걷는 속도전이었다면, 요즘 나의 걷기는 아무런 목적 없이 최대한 어슬렁거리며 걸으면서 주변 온갖 것에 정신 뺏긴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 등도 느낄 수 있고, 동네 개와 고양이, 새와 닭 울음소리까지 듣는 걷기다. 동네 한 바퀴를 걷는 것이 매일 똑같아 보여도 사실은 매일 똑같기는커녕 엇비슷하지도 않고 매일매일 다르다.  


여름이 오기 전에는 산길로 걷고, 풀이 무성해지고 벌레가 왕성히 활동하는 여름에는 포장된 동네 안쪽 길로 걷는다. 여름 걷기의 묘미는 동네 한 바퀴 걷고 돌아와 마당 수돗가에서 하는 세수다. 세면대에서 물 튈까 봐 조심스럽게 하는 세수와 달리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면 꼭 어푸어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씻게 되고, 얼굴과 목, 팔과 다리를 씻으며 반 샤워를 하는데 수돗가에서 씻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엊그제 저녁 하늘


아침에는 주로 반려견 여름이와 둘이 걷는데, 지금은 딸아이 방학이라 딸아이가 따라나서면 함께 걷기도 한다. 혼자 걸으면 걷는 속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조용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고, 함께 걸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저녁에도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저녁에는 우리 세 식구와 반려견이 함께 걷는다. 지금처럼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해 떨어지면 시원하다. 이 시원함은 하루 종일 에어컨을 쐬며 실내에 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시원함이다. 요즘엔 저녁 걷기의 묘미는 해 떨어진 하늘의 황홀한 다이내믹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요즘엔 낮에는 태양이 불타고, 저녁엔 노을이 불탄다. 엊그제는 딸과 함께 북두칠성을 함께 보았고, 그제는 무지개를 보았고, 어제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을 보았다.       



가끔 때를 놓치면 가기 싫고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걷고 나서 기분이 안 좋았을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걷기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일상의 의식이기도 하고, 가족과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혼자 생각하고 감상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걷기만큼 일상적이면서 예술적이고 자연적이면서 혁명적이고 실용적이면서 철학적인 것이 있을까. 요즘 걷는 나를 보면 앉아서 일만 하다가 집에 오면 눕방 하던 시절 어찌 살았나 싶다. 이제부터는 직립보행하며 살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11. 퇴사 후 미라클 모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