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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5. 2020

덩어리

매스 모형(mass model)의 역할

땅의 해석이 마무리되었어요.
우리 만날까요?


건축가와의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정확히 보름 뒤에 다시 연락이 왔다. 땅에 대한 1차 해석이 끝났다고 하셨다며 모형을 가지고 오신다고 하셨다. 벌써? 이렇게 빨리? 좀 빠른 정도가 아니라 빨라도 너무 빨라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나는 타지도 못했는데, 내가 꼭 타야 할 차가 저만치 달아나면서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보니 모형이란 디테일이 없이 덩어리 형태로 표현한 매스(mass) 모형이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설계에 들어가기 전 건축가의 시선으로 땅의 모양을 놓고 세 집을 덩어리(mass)로 앉혀보는 것이다. 이 땅에 세 집이 어떻게 앉으면 좋은지, 집은 어떤 모양을 하면 좋은지, 땅과 주변 환경에 대한 건축가의 이해와 해석이 담겨 있다. 매스 모형은 시야가 협소하고, 평면에서 입체를 읽어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집이 네모 반듯했으면 좋겠어요.


이 중요한 자리에 나는 중요한 선약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 남편이 보내준 카톡 사진으로 매스 모형을 처음 보았다. 나의 반응은 엥? 이었다. 아무리 디테일이 없는 덩어리 형태라지만, 밑면이 오각형인 오각기둥 모양의 매스가 낯설었다. 나는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깬 훈데르트 바서를 좋아하지만, 내 집에는 그의 철학을 녹여내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다. 곡선은커녕 네모 반듯해야 공간의 낭비없이 효율적인 설계가 나올 거라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를 신봉했다.   


집이 좀 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집이 작아 보였다. 건축가는 우리 땅의 크기를 봤을 때 바닥면적을 15평으로 해서 2층, 즉 연면적 30평을 제안했다. 다른 집은 몰라도 30평이면 우리 세 식구에 딱 맞는 면적이다. 그리고 지금 집이 너무 커서 불만이지 않았나. 그런데도 모형만 보면 왠지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컨셉 스케치_스킵 플로어로 되어있다(설계 : 코비즈)
스킵 플로어는 싫어요.


건축가들은 우리 땅의 경사(slope)진 모양을 자연스럽게 살려 스킵 플로어를 제시했다. 스킵 플로어는 한층씩이 아니라 반층씩 올라가도록 설계된 것을 말한다. 스킵 플로어는 장단점이 있다. 공간이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다양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장점이 있지만, 시각적으로 분절되어 산만하고, 이동하고 청소하는데 불편함이 있어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개방적인 것도 좋지만 프라이버시도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세 집이 모두 마당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나란히 세 집이 같이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같이 살아서 불편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공유 공간을 최소한으로 하고, 가능한 독립적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러 해를 뒤섞여 살아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 세우기가 아닐까 싶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공유도 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반려견 공간도 필요해요.


집을 지으면서 나는 딸보다는 여름이를 더 많이 생각한다. 집을 짓게 된 결정적인 요인도 딸 보다는 여름이 때문이다. 딸은 집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하지만 반려견은 사정이 달랐다. 작은 울타리 안에 묶어 키우다 보니 갈수록 예민해지고 사나워지고 있었다. 여름이 나이 벌써 8살, 더 늦기 전에 여름이에게 보다 쾌적하고 안정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막상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더니 막상 매스 모형을 보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같이 집을 짓는 것에 대한 기본 전제와 다양한 논쟁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첫 인터뷰 때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디테일 없는 덩어리가 디테일을 부르고 있다. 텅텅 빈 덩어리는 욕망 덩어리가 되겠지, 욕망 덩어리는 웬수 덩어리가 되겠지. 나의 덩어리는 어떤 덩어리가 될까?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세 집의 매스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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