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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5. 2020

운명

집 위치 정하기

덩어리(mass model)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덩어리가 나타나자, 그동안 잠잠하던 것들이 이때다 하며 마구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프로그램에 대한 디테일이 분출되기 시작했고, 서로 눈치만 보던 위치(편의상 A, B, C)에 대한 선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스 모형을 받는 날(하필 그 중요한 날), 나는 없었다. 뒤에 남편에게 전해 들었다. 남편은 두 집이 선호하는 자리가 A와 B라고 귀띔해주었다. 마치 남은 C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처럼 들렸다. 혼란스러웠다. 잘 모르니까 선호를 갖기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상의를 했다. 돌아온 대답은 잘 모르겠다,였다. 평생 부동산에 관심 없이, 한 평생을 한 자리에서 살고 계신 터라 아실 리가 없었다. 대신 토건사도 운영하고 집도 지어서 많이 팔았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 친구에게 물어보니 C가 제일 좋다고 하셨단다. C가 도로에서 가장 가깝고, 도로에 접한 면이 가장 넓기 때문에 세속적인 의미에서 가장 좋은 땅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시장 가치가 가장 높고, 팔 때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나의 마음은 C로 가지 않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반려견인 여름이를 위해 어디가 좋을까 고민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소 뒤로 물러나 있는 A로 마음이 쏠리고 있는 사이, 남편은 C도 마음을 두고 있었다. 남편은 어느 자리던 그 자리에 맞게 설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는 두 집이 모두 선호하지 않는 C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가 C가 된다면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나는 작게라도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자유로운 여름이의 독립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풀러 붙여놓은 스티로폼 덩어리를 뜯어서 뒤집었다. 그랬더니 작게나마 뒤뜰이 생겨났다.


제비뽑기를 합시다.


세 집이 함께 모여 A, B, C의 장단점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이렇게 몇 번 토론하다 보면 결정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3호 집 엄마가 제비뽑기를 하자고 했다. 제비뽑기? 복불복에 맡기자고? 나는 좀 더 토론한 다음 천천히 결정하자는 쪽이었다. 생각할 시간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와 달리 3호 집 엄마는 속전속결형이었다. 땅을 보고 온 것도 사자고 제안하고 추진한 것도 3호 집 엄마였다. 질질 끌면 머리만 복잡해진다며 벌써 종이를 잘라서 제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속도감에 휘청거리면서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제비뽑기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운과 운명에 맡기는 제비뽑기라면 아테네로 거슬러 올라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어쩌면 가장 민주적 방법이 아닌가?  


제비를 모자에 넣었다. 각 집을 대표하는 아이들 셋이 나와 가위바위보를 하고, 이긴 사람부터 뽑는 거다. 내 인생에서 제비뽑기를 해본 적이 있던가? 없던 거 같다. 그냥 놀이 삼이 하는 것도 아니고, 집 지을 자리를 제비로 뽑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딸아이가 쪽지 하나를 짚어 올렸다.


엄마, 우리 A야!"


그 순간 멍해지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표정을 어찌해야 할지도 몰라 얼굴 근육도 갈피를 잃은 상태였다. 모두가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빠르게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집에 와서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딸아이가 자기가 잘못 뽑았다고 생각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니 잘못이 아니야. 그냥 엄마 마음이 이상한 거야. 엄마도 뽑기는 처음이라서..."


딸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딸의 눈에 눈물나게 만들었다. 왜 이 엄청난 제비뽑기를 아이들에게 하라고 했을까. 이 무책임한 어른들같으니라고. 아이들에게 평생 큰 짐을 지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제비뽑기는 잘한 것 같다. 제비뽑기가 괜한 좌절감과 박탈감, 후회와 원망을 줄이고 운에 복종하게 하는, 어쩌면 가장 공정하고 공평하고 깔끔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가 집 지을 자리는 A가 되었다


2019년 7월 14일 일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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