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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6. 2020

충돌

1차 평면도

벌써 재산세를 내라고?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땅 산지가 얼마나 됐다고, 등기부등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벌써 재산세를 내라는 것인가. 관공서는 이럴 때는 재빠르구나. 찾아보니 토지 재산세는 매년 6월 1일을 기준으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1년 치 재산세를 부과하는데, 7월에 1/2, 9월에 1/2 나눠서 낸다고 했다. 6월 1일 이후에 땅을 샀다면 올해 재산세는 안 내도 되는 거였다. 우린 몰랐다. 땅주인은 난생처음이니까.


내 앞으로 나온 재산세는 아니다. 땅을 살 때 남편 명의로 했다. 친한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는구나, 남의 속도 모르고 놀려대며 웃었다. 남편이 예뻐서도 아니고, 남편을 믿어서도 아니고, 순전히 내 편의를 위해서였다. 나는 도장과 신분증 등을 가지고 나임을 증명하는 일과 관공서나 은행에 드나드는 일을 세상 싫어한다. 애초에 나는 이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땅을 사고 싶었던 것도 남편이었기에 명의도 남편 이름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아무리 남편 명의라고 해도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 건축가들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셨는지 1차 설계안이 나왔다고 만나자고 하셨다. 벌써 80%의 완성도를 가진 구성안이라고 하셨다. 숫자는 확실히 사람을 압박해왔다. 지난번 매스 모형을 본 이후 평면도는 처음 보는 거라 너무 궁금했다.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사진 한 장을 밴드에 올려주셨다. 밤샘 작업한 그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역시 건축가는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디테일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느껴졌다. 바닥면적이 넓어진 듯했고, 따라서 세 집의 간격이 좁아진 듯했다. 어떤 사람은 집이 넓어져서 좋다고 했고, 집 간 간격이 좁아져서 답답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림만 보고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평면도를 보았을 때, 나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싫어도 표정관리를 하면서 예의상 수고하셨네요,라고 먼저 인사성 멘트를 치고, 진심을 그것도 아주 돌려가며 말하는 나이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순서대로 되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이 넓게 펼쳐지기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계단이 먼저 나오고 LDK(거실+주방+식당)가 계단 뒤쪽으로 숨겨져 있었다. 현관 앞에 계단이 딱 버티고 있어서 답답했다. 주방도 작아 보였다. 당황하는 나를 붙잡고 정 소장님이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거실과 주방이 보이면 모든 살림이 다 드러나게 되고, 집이 아니라 가전 가구의 전시장처럼 될 거라고 하셨다. 계단이 파티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고 맞는 말이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오랜 고정관념에 따른 심리적 장벽이 대단했다.

1차 평면도_현관에 들어서면 계단이 있고 뒤로 거실이 펼쳐진다. 마당에 여름이 집이 있다(2019.7.25)


건축가는 누구인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잘 그려주면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건축가들은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건축가는 당장의 필요보다는 집이라는 본질과 욕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땅을 해석하고, 그 땅에 맞게 집을 앉히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듣고, 우리의 미래를 제안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축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나의 과거와 미래가 부딪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 내가 보고 듣고 배운 것, 나의 오랜 고정관념, 선입견 등 나의 사고방식에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환영하기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의 과거와 나의 미래는 사이좋게 잘 만날 수 있을까? 이제 진짜 숙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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