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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7. 2020

조율

순환하는 집의 탄생

이게 얼마만인가. 남편과 내가 이렇게 정답고 좋았던 적이. 몇 달간 우리는 참 많이도 싸웠다. 집을 짓기까지 많이 싸웠고, 집을 짓기로 하고서도 많이 다퉜다. 이혼하네마네 했던 우리가 다정스레 머리를 맞대고 몇 시간째 평면도를 보면서 어건 어때? 저건 어때? 하면서 신혼집 가구 고르듯 세상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4차 수정을 거친 지금의 평면도가 그럭저럭 우리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래, 바로 이거야! 결심했어!'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평면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연필로 이렇게 저렇게 끄적거려보던 남편이 말했다.

이거 어때? 집이 꼭 네모 반듯할 필요 없잖아?


그러면서 오각형의 바닥을 그려 나에게 내밀었다. '뭐, 오각형? 제 정신이야? 지금까지 내 얘기는 어디로 들은 거야? 나는 네모 반듯한 집을 원한다고!' 그걸 뻔히 아는 남편이 겁도 없이 도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조화 속인가. 콩깍지라도 씐 건가. 오늘 남편이 그린 오각형은 좀 색달라 보였다. 가끔 남편이 간헐적 천재처럼 보이는 희한한 착시현상이 일어나는데 바로 지금인 듯했다. 하지만 거의 설계도가 마무리되어 가는 단계에서 평면의 큰 변화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냥 이러고 묻고 지나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평생 한 번 지을까 말까 하는 집이잖나. 밤새 뒤척였다. 남편이 그린 오각형이 자꾸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서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그리고 정 소장님께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금방 답이 왔다.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우리도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기에 더 고집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메시지가 왔다.


내가 대충 그려본 1층 평면도(2019.8.23)



보내 주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가고 있어요.
그려보니까 전체적으로 순환하는 재미난 집이 될 것 같아요.


'재미'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말이다. 보통 '재미난 집'이라고 표현할 때는 일반적이지 않은, 뭔가 창의적이고 유니크한 집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과연 어떤 그림이 나올까? 한편으로 기대가 되면서도 더 망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루, 이틀 기다리는 시간이 한 달, 두 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새 평면도를 받았다. 정말 새로운 그림이었다. 자꾸 보다 보니 오각형의 집에서 동그라미가 보였다. 그 동그라미를 따라 눈으로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도면에 보이지 않는 동그라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계단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집이었다. 현관에서 거실, 방, 식당, 주방, 다용도실, 다시 현관으로 돌아 나온다. 바꿔 말하면 현관에 두 갈래길이 있다. 하나는 거실로 직행하는 길, 또 하나는 주방으로 직행하는 길이다. 보통은 중문을 통과해서 거실로 들어오겠지만, 장을 본 후에는 다용도실과 주방으로 바로 직행할 수 있다. 친정이니 시댁에 다녀올 때마다 밤늦게 도착하여 졸린 눈을 비비며 김치통, 쌀 포대, 사과 박스, 마을 포대 들고 날랐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현관에서 왼쪽이 거실, 오른쪽이 주방으로 가는 길(2019.8.25)


참 나도 좋으면서도 주저하는 마음은 뭔가. 집 지으면서 내가 참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도면이 나왔는데 또다시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 마음에 좋은 건 맞는데, 처음 마음에는 매우 배치된 도면이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네모반듯한 집도 아니고, 거실+다이닝+주방(LDK)이 하나로 완전히 통합된 것도 아니었다. 내 신념과 다르잖아, 낯선 그림이잖아, 하면서 심리적인 장벽이 다시 올라가려던 참이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지금 그림 좋잖아. 좋은데 왜 좋다고 말을 못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고! 속 깊은 데서 올라오는 소리가 장벽을 후려쳤다. 에라, 모르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우리는 새로운 도면을 선택했다. 맞다. 나는 변심했다. 설계 과정에서 집은 네모반듯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과 신념에 점점 금이 갔고, 이제야 심리적인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드디어 나의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만 말하면 우리 집은 네모반듯하지 않고, 동그라미가 수북이 쌓인 오각형이 되었던 말씀.


2층도 계단실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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