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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6. 2020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요

설계가 뒤엎어지다

건축가는 그림을 그린다.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기보다는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화가와 다를 것이다. 우리 건축가들도 우리의 바램을 담아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1차 평면도를 본 후 일주일 만에 2차 설계안이 밴드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만나지 않고 온라인 상에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재빨리 우리 평면도를 살펴보았다. 지난번에 우리가 요청한 대로 계단이 거실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고, 거실이 현관 쪽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었다. 남편이 원했던 툇마루도 거실을 빙 두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우리가 원하는 그림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 보완하면 될 것 같았다.

2차 평면도와 입면도_툇마루가 추가되었다
두 집 사이에 껴서 너무 답답해요.


하지만 다른 집에서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제 목소리가 아니고 문자로 본 것인데도 문자에서 목소리가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평소 조용하던 2호 집 엄마였다. 본인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고 있다고 이의제기를 했다. 처음에 약속했던 가이드라인(바다면적 15평)을 모두 상실하고, 조화와 균형이 깨진 배치계획이라고 했다. 자기 집이 점점 포켓 속에 들어가는 형상이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사실 평소 2호집 엄마의 성격을 생각할 때 상당히 센 문제제기였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세 집이 모여서 2호집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2호집 엄마의 요구를 바탕으로 세 집의 임시대표를 맡고 있는 남편이 대표 건축가와 상의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회의적이었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너무 잘 알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그 요구를 모두 담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현재 안에서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뒤집는 것 역시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한두 달 밤새면서 작업한 건축가가 있고, 나머지 두 집은 도면을 거의 확정하려던 단계까지 와 있어서 모두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건축가는 흔쾌히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주었다. 대신 여름 휴가를 다녀와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여름 휴가 동안 영광에서 천연발효종 빵을 배운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연히 지인의 페이스북을 보다가 거기서 빵을 만들고 있는 건축가님을 발견했다.그 사이 뒤꼭지만 봐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빵 굽는 건축가라. 흥미로웠다. 그 사이 2호집 엄마는 셋째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에 들어갔다. 설계는 잠시 멈추어 섰지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9년 8월 1~2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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