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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31. 2020

게으른 자를 위한 주방

설거지 쌓여있어도 괜찮아요

우리는 건축가에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할 때 '거실생활자' 라고 설명했다. 방에서는 잠만 자고 모든 것을 거실에서 한다. 책 읽고, TV 보고,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리고, 밥 먹고, 손님 초대해서 맥주 한 잔 하고, 일도 하고, 모든 것을 거실에서 한다.


원래 거실과 식당과 주방(이하 LDK, Living+Dining+Kitchen 줄임)을 완전히 통합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거실이 넓어 보이고, 여럿이 모였을 때도 넓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LDK 통합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설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오랜 신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실, 주방, 식당은 무엇을 위한 공간이며, 우리는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여러 갈래의 질문으로 뻗어나갔고, 우리를 엉뚱한 종착지로 데려다 놓았다. 거실과 주방이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분리한 것이다. 이건 처음 생각과도 다르고, 우리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즈음에 남편과 나눈 대화가 결정적이었다.


당신은 설거지 쌓여 있으면 어때? 설거지 쌓아놓고 TV보면 안 불편해?


나는 응,이었고, 남편은 아니,였다. 남편은 설거지를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하는 스타일이고, 난 설거지를 바로바로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니 남편이 설거지를 해야 할 차례인데도 쌓아두고 있으면 결국 내가 설거지를 하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짜증이 나곤 했다.


싸우자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궁금했다. 단순한 개인적인 성향 차이일 수 있지만, 이야기하다보니 성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편에게 설거지(집안일)는 어디까지나 옵셔널이다. 집안일은 시간 남으면 하는 일,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일, 하면 칭찬받는 일이다. 나에게 집안일은 언제나 의무다. 우선순위로 해야 하는 일, 꼭 해야 하는 일, 안 하면 불편하고 죄책감이 생기는 일이다. 그런 인식 차이 때문에 같은 설거지를 보고도 생각이 다른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남편이 차례가 되었을 때 설거지를 바로 바로 하거나, 내가 설거지가 쌓인 것을 보고도 괜찮아야 한다. 살아보니 전자는 불가능하다. 밥 먹고(또는 밥 먹으면서) TV 보면서 웃고 떠드는 게 남편과 딸의 오락생활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TV때문에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한다. 남편과 딸이 엄청난 강도로 연결되어, 대단히 밀도있는 대화를 나누는데, 이거까지 못 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요즘은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웃고 논다. 그럼 내가 설거지를 쌓아두고도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설거지는 하나의 예일뿐,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우리 주방은 늘 혼돈 속이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늘 주방에 붙어살며 깨끗하고 갈끔하게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디자인이 사람의 행동과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이번 설계에 반영하고 싶었다.

 

거실과 주방이 연결되면서도 독립성을 띨 것

현관에 들어섰을 때, 주방(특히 싱크대)이 바로 드러나지 않을 것


안 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거실에서 싱크대가 안 보인다면 밥 먹고 설거지를 바로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시야에서 멀어지면 나도 밥 먹고 TV 보면서 숨 좀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때마침 그런 설계안이 도착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거실에 앉으면 다이닝룸과 그 뒤 큰 고정창이 보이고, 식당에 앉아 있으면 거실과 위쪽 가로로 긴 고정창 보인다


완전히 분리되어 고립되는 방식은 아니다. 살짝만 어긋나 있어도 독립된 듯 연결된듯 한 느낌이 된다. 그때쯤 남편이 사다 준 '작은 땅 큰집 짓기(로그인)'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꽂힌 말이 있다. '공간의 깊이'다.


처음에 내가 원했던 것처럼 LDK를 통합하면 흔히 사각으로 에워싼 커다란 원룸이 되는데, 그러면 시선도 감각도 벽에서 뚝뚝 끊어져 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L자로 어긋나게 배치하면 각각의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시선이 꽂히게 되고 시선 끝에서 다른 공간이 펼쳐지게 되면서 같은 면적이라도 더 넓고, 더 깊게 공간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오~!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그 시선의 끝에 채광과 풍경만을 위한 고정창을 두기로 했다. 거실에서 앉았을 때 보이는 대각선 방향에는 큰 통창을 두어 밖을 바라보게 했고, 식탁에 앉았을 때 보이는 대각선 방향 위쪽으로는 가로로 긴 고정창을 두어서 시선이 안 보다는 밖으로, 위로 향하게 했다. 최종적으로 이 디자인을 선택하면서 집은, 거실은 비로소 무조건 크고 넓어야 할 것 같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크기 컴플렉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론상! 그림상!! 이야기고 실제로는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 지어봐야 알고, 살아봐야 안다. 혹시 좀 아니더라도 어쩌겠나.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냥 맞춰서 사는 수 밖에 없다. 사실 디자인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지만 그럴 리가 없다. 잘 지어놔도 엉뚱하게 살면 다 소용 없게 되고, 좀 마음에 안 들어도 거기에 맞춰 재미있게 잘 살면 그대로 좋은 거다.


집 지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잘 하자. 남편이 설거지 잘 하고, 옷과 양말만 아무데나 안 벗어놓고, 쓰레기만 잘 치워도 우리 집에 평화가 깃들 것 같다. 올 설에 차례가 끝나고 남편이 시키지 않아도 설거지를 자처하여 하는 모습을 보고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남편 보고 있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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