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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여니 Dec 18. 2021

견딜만한 쳇바퀴를 찾아서

  1년 여의 휴직 끝에 드디어 퇴사를 했다. 중고등학생일 때는 학교에, 대학생일 때는 대학교에, 취업 후에는 회사에, 어디엔가 항상 소속돼 있었던 내가 사회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프리랜서, 누가 보면 백수. 프리랜서와 백수 그 중간 어디쯤의 모습. 그 모습이 열심히 일하는 프리랜서 였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예전보다 물리적인 시간은 훨씬 많아졌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심심하다거나 지루하기는커녕 너무 바빠서 내 일정을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요즘이다. '회사 안 다니니까 매일 놀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어, 최고야!'가 누구나 바라는 꿈 같은 생활이겠지만, 생각보다 일상의 변화는 크지 않고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며 반복되는 일상은 똑같다. 오히려 내가 정한 과제를 허둥지둥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버리는 날이 수두룩하다.

  먼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열거해보자. 일단 나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려야 한다. 감사하게도 일이 들어와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손이 굳지 않도록, 그리고 내 작업물을 노출시키고 홍보하고자 개인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주기적으로 완성된 작업물이 나와줘야 하고, 그에 따른 소재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간단한 작업만 해도 생각하는 것보다 일상이 꽤 바빠진다. 내 그림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 덕분에 중간 중간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기한 내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내 입맛대로 그리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가 더 많이 소요되고, 의뢰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해 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개인적인 작업이나 의뢰받은 작업을 몰입해서 몇 시간 하고 나면 어느새 하루의 절반은 지나있는데 진은 쭉 빠진다.

  내 생활의 중심이 되는 그림 작업을 제쳐두면,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서 해야 하는 집안일과 운동이 날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에 최소 2번은 요가원에 가서 수련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유산소 운동으로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해 집 근처 트랙에서 달리기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퇴사한 후 집안일과 요리를 내가 조금 더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라도 청소를 그때 그때 해야 하며, 든든한 집밥을 위해 이틀에 한 번씩은 반찬을 만들고 메인 요리를 해야 한다. 사 먹으면 편하기라도 할 텐데, 사 먹거나 배달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더 바빠졌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 더해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꾸준히 독서를 하고 있고, 심지어 매달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어 이 스케줄도 틈틈이 관리해야 한다. 영화도 잊을 만할 때쯤 한 편씩은 꼭 보고 있는데, 책이나 영화 같은 문화 생활을 꾸준히 놓지 않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인 동시에 내 그림 작업을 위한 것이기도 한데, 책이나 영화로 인해 사고의 영역이 넓혀지고 상상력이 발휘돼 영감을 얻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꼭 SNS에 남겨야 한다. 그러려면 또 시간을 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것도 시간을 여간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내 생활은 그림 그리고, 책 읽고, 집안일 하고, 요리 하고, SNS를 관리하는 반복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비록 재밌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림 그리는 것 또한 "일"로서 매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하루에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기 때문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졸린 눈을 비비고 억지로 일어나야 한다. 대부분은 퇴사를 하면 매일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마냥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같은 경우에는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회사에 다닐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나에겐 매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그리고 모레도, 그 다음 날에도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매일 매일이 예상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내일이 되어도, 모레가 되어도,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출근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하지만 퇴사하고 난 지금, 반복되는 일상은 여전하지만, 나는 예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로움을 느낀다. 직장인일 때의 내 생활과 지금의 내 생활이 똑같이 쳇바퀴처럼 반복되더라도, 조금 더 견딜만한 쳇바퀴는 있는 모양이다.

  회사에 있을 때는 머리가 아픈 일을 잘 마치고 나서도 거기에서 의미도 보람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어도 내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의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또 의뢰받은 작업을 잘 마쳤을 때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면, 지금은 내가 내 일정을 계획하고 내가 할 일들을 결정하며 내 삶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일이 없거나 내 할 일을 빨리 끝내도 9시부터 6시까지 무조건 앉아 있어야 했고 심지어 일이 없을 때는 바쁜 척 연기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내가 시간을 조절해서 일을 빨리 끝내면 남는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컨디션이 달라진 날에는 낮잠을 푹 자고 나서 저녁에 일 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어도 회사에 있을 때는 내겐 감옥 같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기분을 매일 매일 맛본다. 지금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라거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졸려 죽을 것 같은 아침이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가 또 주어졌구나. 알차게 살아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영차 몸을 일으킨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매일 매일을 다이나믹하게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만  수도 없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무거운 몸을 끙차 일으켜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며 반복되는 하루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견딜만한 쳇바퀴가 분명히 있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놀고 먹을  있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일을 계속 해야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어도 ' 인생은  이럴까' 매일 욕을 하며 돌리게 되는 쳇바퀴가 있고,  의지와 마음을 담아  발로 열심히 돌릴  있는 쳇바퀴가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이겠지만,  속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퇴사를 했고 아직도 쳇바퀴 속에 있다. 하지만  쳇바퀴 속에서 훨씬   자유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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