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인듯 아닌듯 이상한 심리보고서

by 요가여니



학생 때부터 덕질은 계속 해왔다고 자부해왔다. 뭘 몰랐을 때 막연하게 좋아했던 지오디부터 머리가 좀 커서 좋아한 동방신기, 그리고 그동안 살짝 살짝 스쳐지나갔던 가수나 배우들까지. 그 이후 한동안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최애가 없어서 '아, 그렇게 과몰입할 정도로 빠져서 좋아할 나이는 지났나보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일상 속에서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빠지게 된 대상을 또 찾아냈으니 '덕후'의 자격을 다시 찾은 것처럼, 내 자아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덕질의 대상에 대한 사진을 찾고 영상을 찾고 소위 '떡밥'이라는 것을 미친듯이 검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현듯, 새삼스럽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유투브에서 '최애'의 온갖 영상을 다 보고 커뮤니티에서 별의별 정보는 다 찾아보면서도, 정작 나는 그의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 버튼은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다.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건 팬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애의 인스타그램은 물론이고 최애 지인들의 인스타그램까지 팔로우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 최애의 사진이나 영상이 뜰지 모르고, 언제 인스타 라이브가 켜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위터에서 최애의 이름을 검색해 계속 스크롤을 내리고 유투브 영상 중 보지 못한 영상은 없는지 계속 스캔을 하는 나는 그의 팔로워가 아니다. 팔로우는 도저히 누를 수가 없다. 이상한 건 또 있다. 내가 파고 있는 최애의 인지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공식적인 굿즈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 구매를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앨범을 사고 포토카드를 샀던 건 동방신기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내 일상의 활력소가 될만한 대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심하게 빠진 이번에도 내 지갑은 굳게 닫혀있다. 커뮤니티에서는 배송된 굿즈를 인증하는 사진이, 왜 내 건 배송이 늦어지냐고 한탄하는 글들이 무수하게 올라오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팬사인회에 당첨되고 싶어서 앨범을 많이 주문하기도 하고, 사진이 한 장 실린 잡지를 마구 구매하기도 하고, 최애의 콘텐츠가 1위에서 떨어질까봐 계속 노래나 드라마를 틀어놓고, 내가 좋아하는 최애 기죽지 말라고 응원의 편지를(정말 손편지를) 보낸다거나 하는 행위들을 나는 전혀 하지 않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을 덕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덕질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덕후 DNA가 있다고 확신했지만 나는 정말 덕후의 자격이 있는 것인가? '덕후'라는 정체성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것은 진지한 성찰이며, 최애를 보면 설레고 하루종일 최애 생각을 하지만 SNS 팔로우는 하지 않고 팬사인회에는 가고 싶지 않으며 굿즈도 사지 않고 일대일 채팅이나 영상통화는 더더욱 원하지 않는 이 모순적인 심리에 대해 답을 구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인정하자. 나는 수 만명, 수십 만명, 수백 만명의 팬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최애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한들 최애에게 나는 그저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순간, 내가 콘서트에 가서 사람들 속에 파묻히는 순간, 팬사인회에 가서 최애와 대화하기 위해 줄을 서는 순간, 최애를 응원하기 위한 편지가 수많은 편지들 속에 섞여들어가는 순간, 나는 최애가 바라보는 군중 속 작은 점 하나가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응원한다고 해도 최애가 내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대신 나는 그런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최애를 좋아하고 더 많이 알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다고 내심 생각하지만 공식적으로 팬으로 보일 법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뒤에서 방관자처럼 쿨하게 바라보면 내 자존심도 지키고 얼마나 좋은가.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최애와 동등한 위치의 사회적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의 '팬 234145258호'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마어마한 자의식이라고 하겠다. 덕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팬사인회 같이 팬과 만나는 행사 영상을 보면 나는 최애와 더욱 멀어진다. 팬 한 명, 한 명에게 웃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은 나에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 저 사람은 일을 하고 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설레기는커녕 '프로다' 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최애에게 관심이 없어진다. 혼자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일이 끝나면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도 따로 있을테고 매일 일상적으로 카톡하는 사람도 따로 있을테고 속을 털어놓고 고민 상담을 하는 지인도 따로 있을테지, 생각하면 더 이상 최애를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최애를 생각하며 일상을 살지만 최애에게는 자신만의 인생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엄청난 자의식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최애의 근황은 궁금하고 최애의 새로운 '떡밥'은 계속 보고 싶다.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면서 즐겁게 덕질을 하기에는, 공식적인 팬은 아니지만 한발짝 뒤에서 흐뭇하게 응원하는 독립적인 인간1의 입장을 취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니 내 돈을 써서 굿즈를 살 수는 없다. 돈을 내고 하는 일대일 채팅도, 앨범을 사서 당첨되는 영통팬싸는 더더욱 원하지 않는다. 최애에 대한 마음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너무 진지하게 최애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의 말처럼 나는 순수하게 최애를 좋아하지 못한다. 자기애가 너무 강한 나머지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쿨하고 도도하게 존재하는 것이 더 중요한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내 덕질 인생에 대한 분석 보고서이다. 라이트한 팬으로 만족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최애와 너무나도 가까워지고 싶어하고 최애의 인생에 실제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이렇게 적으니 섬뜩하기도 하다―이상한 덕질을 나는 계속 할 것이다. 적어도 팬이라고 하면서 앨범도 사지 않고 블루레이 DVD도 사지 않고 팬과 대화하는 영상은 되도록 보고 싶지 않고 심지어 최애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도 하지 않는 이 모순적인 심리가 뭔지는 알겠다. 다른 덕후들에 비하면 내게 덕후 DNA가 있다고 할 자격도 없고 진정한 팬도 아닌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이 1n년차 요상한 덕질이 내게 주는 기쁨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일이 끝나고 지쳐서 누워있다가도 최애 영상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고, 자신의 일에 열심인 최애를 보면 다시 삶에 대한 의지가 불끈 일어나기도 하고, 최애처럼 나도 멋진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최애를 좋아하지만 그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하는 요가여니의 모순적이고 뒤틀린 덕질을 계속 응원하고 싶다. 이상한 결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내 눈에 들어와서 내 최애가 됐다는 건 영광일 수 있는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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