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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Jan 12. 2020

나는 아내의 엄마가 아닙니다

모녀 사이로 오해받곤 하는 부부의 슬픈 이야기


우리는 네 살 차이 부부이다.

안타깝게도 연하인 아내는 무척 동안이고 연상인 나는 무척 노안인 축에 속한다. 더군다나 아내는 대부분 캐주얼한 옷차림이 잘 어울려서 자주 입는데 나는 365일 오피스룩이다. 각자 살아오며 어울리는 것을 하나둘 주섬주섬 챙겨 입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외형을 설명한 것은 몇 가지 일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드리기 위함이랍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밤중에 갑자기 야식이나 사러 가자고 들른 편의점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내 아내에게 주춤주춤 다가왔다. 먹을 것을 골라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있던 나는 그를 옆 눈으로 보며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자꾸 내 아내를 보는 상대를 눈으로 쏘아보며 아내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자는 술이 조금 오른 얼굴이었으니까.

거의 물어 죽이기 직전인 사자의 얼굴을 한 내게 그가 아내를 손으로 가리키며 한 말은 이러했다.


"애기 엄마, 애기 아이스크림 하나 사줘도 될까요."


말의 내용이 황당한 것은 둘째치고 그가 말한 '애기 엄마'가 나고 '애기'가 아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눈에 품었던 노기가 급격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냥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편의점을 아내 손을 잡고 나오는 수밖에.

나오자마자 아내도 본인 귀로 들은 것이 정말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되물었고 나는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내는 아주 오래, 아주 길게, 아주 큰 소리로 한참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당시 키가 작고 왜소한 아내는 모자를 쓰고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나갔고 그 모습은 언뜻 보면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나는 아내보다 어림잡아 키가 십 센티는 더 크고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낀 것이 엄마로 보였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아내가 오래 웃자 같이 웃으면서도 약간 부아가 치민 것도 사실이다.

술이 많이 취했던 모양이지.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그런 순간을 몇 번 웃음과 함께 겪으며 시간이 잘도 흘렀다.

그런데 꽤 오래 터를 꾸리던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왔을 때 조금 더 묵직하고 기이한 현상과 마주했다.


그것은 이 집을 초반에 드나들던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대부분 가구를 배송해서 조립해주는 기사님들이나 뭔가를 수리하고 정비해주는 기사님들이었는데, 그분들은 한결같이 직업상 당연하다는 듯 맞이하는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마치 아파트에서 이 시간에 자신들과 대화하는 사람들을 의례 그렇게 부른다는 듯 평이한 말투였다.


나는 그 오해에 어떻게 회답해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렇지만 그 오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단숨에 이해하자 약간 모래알이 씹히는 것처럼 마음이 버적버적거렸다.


그렇게 조금 씁쓸하던 마음은 그분들 중 누군가가 아내를 가리키며 "따님을 참 싹싹하게 잘 키우셨어요, 사모님." 했을 때 거의 쓴 물을 한통 삼킨 듯 잠겨버렸다. 조금 우습기도 한 일화인데 한편으로는 조금 슬프기도 했다. 물론 다시 생각해도 그 슬픔이나 쓴 마음이 그 말을 한 분들께 화살을 겨누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그런 말이 오갈 수밖에 없던 그 관성이 슬펐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평일 대낮 집에 있는 저 여잔 사모님, 사장님이나 선생님으로 불러야 할 남편은 회사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저 자그마한 여자애는 이 집 따님이겠구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가족일 가능성이 높고 가족의 구성이란 의례 그런 모양새니까 그분들은 안전한 호칭과 안전한 화법을 활용했을 뿐일 것이다.





모 평론가가 퀴어영화를 평론하며 '모녀 사이 같은'이란 말을 언급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우리 부부에게도 "혹시 모성애랑 착각하는 건 아니야?"라고 누군가 의심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가 있는가. 딸 같아서 그렇다며 성애를 표현하는 어떤 이들이라면 모를까, 모성애와 부부로서의 성애를 착각 할리가 있는가. 그것을 착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 그 자체가 우습고 슬픈 일이다.


세상은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면 바뀌어있다. 헉헉거리며 사람들은 세상을 쫓아간다.

달리기가 너무 고달파 변해가는 세상에게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걸어가든 기어가든 결국은 쫓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 본래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세상은 2D 고전게임처럼 그런 이들 중 가장 도태되는 자들을 자꾸 화면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고전게임 속에선 화면 밖으로 나가면 게임오버잖아요.)


그러니 언젠가는 나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르기 전 한 번쯤은 생각하고, 내 아내에게 따님이라고 부르기 전 한 번쯤 멈칫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변한 세상에서 통용될 가장 안전한 방식을 찾게 될 테고 그것은 새로운 규칙이 되며, 그 규칙에서 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은 또 화면을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화면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소외된 이들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면서 세상을 쫓아 달리겠지.


삶의 끝에선 부부끼리 성이 같거나 다르거나 잘 모르거나 어차피 같은 모양 아닐까. 다만 서로 조금 낯설 뿐.



추신:

물론 어찌 생각하면 그냥 재미있는 일화고 결론적으로 제가 노안인 것은 맞지요.

그래도 아내의 엄마가 되는 건 조금 곤란합니다.

아주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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