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학교에서 발표해야 하는 것을 준비하고, 교수님을 만나 논문에 관한 상의를 하고, 필요 자료를 모았다. 메일에 쌓여있는 영어 원서 논문들에 숨이 막혀왔지만 한편씩 한편씩 프린트해서 번역하며 틈새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의 감정을 점검해야 했다. 이 감정의 원천에 대해서 내가 보내왔던 24시간을 돌이켜보았다. 아기를 키우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아기를 어렵게 재운 후, 누리는 꿀 같은 육퇴 후 시간을 공부로 할애하고 있자니,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 보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닌 만큼, 우선은 내 감정을 다스리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64기가가 넘치게 쌓여가는 아기 사진들과 생각나는 대로 적어가는 글들에 핸드폰은 어느새 포화 상태가 되어있었다. 수많은 이미지와 문서들에 잠식당해버린 느낌.
돌이켜보면 시간이 없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 시간을 그곳에 쏟지 않았을 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길에 서서 다시금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여유 없고, 조급하게 해야 할 일인가?
내 감정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대답은 '아니다.'였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지쳤으면 잠시 쉬어가면 된다. 나라는 사람은 늘 가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잡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쌓여있는 공부자료들을 외면하고,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미루던걸 하기로 했다.
다이어리를 펴서 내 감정에 대해 적고, 무엇을 하면 기분이 좋을지 적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예쁜 스티커를 붙였다. 그 후 따뜻한 얼그레이 차를 마시며, 그동안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밀린 사진들은 외장하드에 옮기고, 인화할 사진을 추렸다. 이것만 했는데, 답답한 가슴이 좀 진정이 되었다.
너무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온 난.
어느 순간 습관적으로 현재 하는 일들보다 미래를 위해 하는 일이 더 가치 있다고 은연중 결론 내리고 살아왔다. 24시간의 시간이 미래를 위해 소모되고, 현재를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일에만 소모했다.
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걸 잘 안다.
미래만 보고 가다 보면 지금처럼 지치는 순간을 마주하기에.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현재를 위해 하는 어떤 일도 가치 없다생각하지 말기. 너무 미래를 위해서만 살지 않기.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오늘 나는 내가 가치 있다 여기는 미래를 도모하는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곤 내가 즐거운걸 했다.
마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고 내가 좋아하는 과자 여러 개와 만화책 10권을 잔뜩 쌓아놓고 보는 기분.
그 기분이 느껴지자, 가치 있는 일만 하라고 나를 다그치던 내 안에 나에게 지친 또 다른 내가 위로받았다.
이 시간을 통해, 회복한다는 걸 안다.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을 아무렇지 않게 툭하고 내려놓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가치 있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잠시 아이가 먹을 과일을 사러 마트에 가는 길에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손끝 시리게 글은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