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시인이나 예술가
파충류를 좋아하는 나는, 언젠가 파충류 관련 사업을 하고 싶다는 작지만 큰 소망을 갖고 있었다.
파충류는 수입하여 분양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어떻게 파충류를 브리딩하고 수출하는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진짜 마음속에 있는 목적은, 이런 뚜렷한 목적보다는 그냥 '정처 없이 떠돌기'였다. 일명 '보헤미안'처럼 살아보기.
그래도 저렇게 '사업 구상하러 간다!'라고 말하면 좀 있어 보이는 명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름의 '대외적 세계여행 제목'을 붙여 본 것이다.
솔직히 이 '대외적 목적'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그 나라 자체를 즐길 시간조차 빠듯해서, 사업구상이고 브리딩이고 뭐고 뒷전이 된 것이다.
여행 전 친구가 선물한 오르골. 내가 말을 좋아해서 말 모양을 골랐으며, 빙글빙글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전목마처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단다.
아무튼 이렇게 큰 생각 없이 떠나게 된 세계여행이었지만,여행 중 꼭 하고 싶은 것들 리스트는 오래전부터 구상되어 있었다.
길거리 장사 해보기
현지 외국인 친구들 사귀기
그리스에서 마라톤 참가하기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 횡단하기
실크로드 따라 중앙아시아 횡단하기
둔한 몸과 어울리지 않게, 나는 마라톤을 좋아한다. 마라톤은 민첩함과 운동신경이 필요 없다. 지구력만 있으면 된다.
마라톤의 기원이 된 곳, 그리스 아테네에서 하프마라톤을 뛰어보고 싶었다.
길거리 장사를 해보고 싶은 이유는 단순했다. 여행 중 작게나마 수익을 내는 것의 짜릿함을 내보고 싶어서였다.
예전에 부모님과 스키장에 갔을 때, 나의 체력을 과신하고 리프트 종일권을 끊은 적이 있다. 역시나 두 시간도 안되어서 지쳐버렸고, 한참 남은 리프트권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럴 거면 오전권이나 오후권을 살 걸..
낮 열두 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후권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걸 싸게 팔면 팔리지 않을까?'
마침 시간이 딱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이라, 충분히 살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없으면 말지 뭐, 하는 마음으로 매표소 앞을 서성였다.
어떤 부부가 어린 딸아이 두 명과 함께 매표소로 걸어가길래, 얼굴에 철판 깔고 말을 걸었다.
'혹시 오후권 필요하세요? 성인 두 장 싸게 팔게요'
'(부부가 잠시 눈빛 교환을 하더니) 얼마에 파시는데요?'
카드할인과 통신사 할인을 받는 가격보다 만 원 정도 싼 가격을 제시했다.
잠시 머뭇거리고 한 번 더 눈빛 교환을 하더니 미안하지만 괜찮다고 하고 그들은 매표소로 향했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 생각하고 다음 타깃을 모색했다.
그런데 아까 그 가족이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저희가 살게요~ 계좌이체 해도 되죠?'
짜릿했다! 이게 장사의 짜릿함이구나. 바로 쿨거래를 하고, 그들은 매표소에서 아이들 리프트권만 사고 스키장으로 입장했다. 이때 처음으로 '장사 재밌네?'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여행을 다녀보니, 많은 여행자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기타나 우쿨렐레로 버스킹을 하는 이도 있었고, 다이빙 마스터(스쿠버다이빙 강사 바로 아래 단계)로 일하며 돈을 버는 이도 있었다. 이집트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는 레포트 써주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대학생 때부터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가로지르며 아무것도 볼 게 없는 대평야를 바라보며, 기차 안에서 러시아 친구도 사귀고, 중간에 가보고 싶은 도시에 정차해서 러시아의 여러 도시와 공화국들을 엿보는 것..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긴 여정을 함께한 나만의 비밀공간, 나의 일기장
러시아어를 공부할 책을 샀다. 러시아 일정이 최소 한 달이기도 했고, 가고자 하는 나라 중 러시아어권 나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적어도 읽을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싶었다. 부드러우면서 똑똑 떨어지는 형태의 키릴문자는 어딘가 모르게 신비롭고 매력적이었다.
묵혀둔 DSLR 카메라를 꺼냈다가, 휴대성을 위해 미러리스 카메라를 하나 구입했다. 남미나 아프리카에 갈 수도 있으니까 황열병, 파상풍, 디프테리아, 백일해, A형 간염, 장티푸스 등의 예방주사도 맞았다.
워낙 겁이 없는 안전불감증 스타일이라 안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혹시나 해서 호신용 스프레이도 하나 샀다. 효과가 있나 동생한테 시험해 볼까 하다가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참았다. 다행히도 이 호신용 스프레이는 여덟 달 내내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다섯 구간을 예매하고, 여행하면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기 위해 여행자 명함도 만들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