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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연재 Mar 10. 2023

아무것도 없는 풍경을 보러, 시베리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황량함과 황홀함 그 사이 (1)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눈밭 말고는 볼 게 없는 시베리아 대평원,
그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보고 싶었다.





긴 여행의 출발점은 고민할 것도 없이 무조건 러시아, 시베리아였다. 


러시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횡단하는 것은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다.


러시아에 포함된 공화국들도 가보고 싶었고, 꽝꽝 언 바이칼 호수도 보고 싶었다. 볼쇼이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공연도 보고 싶었고, 러시아의 투박한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마침 이직준비를 하며 회사를 쉬고 있는 십오년지기 친구가 나의 여행의 출발점에 동행해 주어, 외롭지 않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친구는 원래 블라디보스톡만 동행하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조금 더 길게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랑 같이 횡단열차를 타게 되었다. 처음엔 여름에 혼자 왔었고 두 번째는 겨울에 친구랑 함께 온 블라디보스톡.


풍경은 여름이 예쁘지만, 혼자 왔을 때랑 또 다른 맛이 있었다.




3박 4일간의 블라디보스톡 여행을 마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했다. 열차를 예매할 때 국적을 입력하는 칸에 남한 대신 북한을 입력해서 조마조마했지만, 별 탈 없이 무사히 잘 탔다.


동지들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가는 길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차할 곳은 총 다섯 도시.  중 첫 도시인 울란우데까지는 꼬박 3박 4일이 걸렸다.


3박 4일을 열차에서 보내며 얻은 생활의 지혜.

10분 이상 정차하는 역에서는 꼭 내려서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 열차에만 계속 있으니까 몸이 뻐근하기 때문!

20분 이상 정차하는 역에서는 주변 마트에 다녀올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개를 산책시키기도 하고, 담배를 피기도 한다. 열차를 놓치면 큰일이니 정차 시간을 잘 확인해야 한다.


정차시간에 주인과 함께 산책 나온 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애견 동반칸이 따로 있다.




3박 4일 동안 횡단열차 안에서의 일상루틴.

친구랑 떠들기,  낮잠 자기, 책 읽기, 일기 쓰기, 열차 안의 사람들 구경하기.. 그리고 창밖의 설원 바라보기. 어찌 보면 지겹지만 그 지겨움조차 여행이 되는 순간. 순간을 '지겨움 속의 힐링'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정신과 육신을 오롯이 쉬게 하고 싶다면, 일생에 꼭 한 번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시길.


시베리아 아니랄까 봐, 설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시베리아에 볼게 뭐가 있어?' 누가 묻는다면, '아무것도 없어'라고 답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그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다.

특별한 건물이나 유적은 없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뭐가 있긴 있다. 눈을 이불 삼아 하얗게 덮여있는 자작나무숲, 옹기종기 모여있는 귀여운 나무집 마을, 대륙 스케일에 맞게 빙판 위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다리...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풍경





3일을 열차에서 보내고 나서 도착한 울란우데. 러시아의 일부이면서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한 울란우데에는 몽골민족이 반, 러시아민족이 반이다. 러시아와 몽골이 공존하는 도시는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해 예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다.

 

러시아인의 외모를 가진 사람들과 몽골인의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며 친구이기도, 가족이기도, 동료이기도, 연인이기도 한 곳이다. 내가 이곳에 살아도 외모적으로는 아무 위화감 없이 섞여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울란우데는 러시아 같기도 하고, 몽골 같기도 하고, 극락세계 같기도 한 신기한 곳이었다.



극락세계같이 느껴졌던 울란우데 림포체 박샤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약 열 시간이 걸린다. 야간열차를 타고 하룻밤을 기차에서 보내는 일정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을 시작하기 전, 횡단열차를 타면 러시아 친구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울란우데까지 오는 3박 4일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쪽 러시아인들은 생각보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잘 없었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횡단열차의 새로움과 약간의 삭막함에 압도되어 쉽사리 러시아인들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하지만 울란우데에서 출발해 이르쿠츠크를 지나 카잔, 모스크바, 그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길에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다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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