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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연재 Mar 16. 2023

반전매력 러시아, 무뚝뚝한 로맨티스트

시베리아 횡단열차, 황량함과 황홀함 그 사이 (2)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탔다. 삭막하고 단조로웠던 이전까지의 횡단열차와는 달리, 분위기가 다채롭고 활기찼다. 이것은 아마 이번 열차에는 귀여운 어린아이들이 많이 탔기 때문이지 싶다.


엄마와 함께 탄 러시안 여자 꼬맹이들이 맛있게 라면을 호로록 먹는다. 건장하지만 앳된 얼굴의 남자 청소년들이 우르르 타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우리를 둘러싸고 앉아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을 건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더듬더듬 말하며, 간혹 휴대폰으로 영어단어를 찾아보며, 우리에 대해서 묻는다.


이름이 뭔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러시아에 왜 왔는지, 우리 둘은 커플인지.. (여자 둘에게 커플이냐니, 참 선입견 없는 질문이다.)


이들은 유도부 청소년들. 시합 때문에 울란우데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유도부 코치님까지 합류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아시안 여자가 타는걸 처음 본단다.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달라는 말씀. 


라면 먹던 여자 꼬맹이들의 엄마였다. 머쓱해하던 찰나에, 그럼 자기들 자리로 옮겨서 더 얘기하자고 우리를 데리고 가는 유도부 아이들.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연락처를 교환한 건 아니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결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던 러시아 아이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첫 친구, 길에서 만나 스쳐가는 첫 친구들이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혼섬으로 들어갔다. 러시아에 온 가장 큰 이유, 바이칼 호수. 무슨 생각이었는지 살을 에는 추위에 나는 얇은 치마와 구두를 신고 갔고, 고통의 8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본 러시아의 대자연, 바이칼 호수의 광경은 그 고통을 상쇄시킬 만큼 벅찼다.




바이칼과 이르쿠츠크 일정을 마치고, 기차역에서 친구와 나는 잠시 작별인사를 했다. 혼자 하는 시베리아 횡단이 시작된 것이다. 드넓고 황량한 시베리아 대평원에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했지만, 동시에 진짜 모험이 시작되는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29시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카잔까지 35시간.

총 64시간을 기차에서 보내게 된다.



신데렐라가 살 것 같은 카잔 크렘린. 처음으로 카우치서핑을 통해 친구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이때까지는 3등석에 탔는데, 이제부터는 2등석과 1등석을 타기로 했다. 2등석은 3등석에 비해 천국이었다. 훨씬 넓고 쾌적하고 청소도 더 자주 한다. 2박 내내 정말 불편한 거 못 느끼고 지냈다. 너무 안락해서 답답함보다는 편안함이 클 정도였다. (그래도 3박은 지겨워서 못할 것 같다.)


단 하나의 단점은, 3등석처럼 오픈된 공간이 아니라 방으로 되어 있어서 친구를 사귈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3등석에 지쳐있던 나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첫 번째 구간 기차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2등석은 4인 1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조상 옆사람(일명 짝꿍자리)과 테이블을 공유해야 한다. 내 짝꿍자리에는 고운 러시아인 할머니가 계셨는데, 외국인인 나를 신기해하며 끊임없이 말을 거셨다. 나는 러시아를 못하고 그분은 영어를 못하시지만, 계속 관심을 보이시며 구글 번역기로 계속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셨다.


내가 구글 번역기를 보여드리자, 나중에는 직접 내 휴대폰에서 러시아어를 타이핑해 말을 전달하셨다. 계속 번역기로 대화를 하는 게 다소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이르쿠츠크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러시아를 혼자 여행하는걸 부모님께서 걱정 안 하시냐고도 물으셨고, 나에 대한 칭찬도 많이 해주시며 나를 예뻐해 주셨다.


오늘이 여성의 날이라며 축하한다고, 앞으로도 쭉 행복하라고도 해주셨다. 정말로 이 날에는 길거리의 수많은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 남자들이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직접 꽃을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러시아 남자들. 러시아인들의 수줍은 로맨틱함이 너무나 귀여웠다.



꽃다발을 들고 가는 러시아 남자들. '여성의 날'은 국가 공휴일일 정도로 러시아에서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아쉽게도 어느덧 할머니의 목적지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고, 나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려 잠시 기차에서 내렸다. 덕분에 역에 마중 나온 할머니의 딸도 만났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곱고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가 떠나시고는 엄청나게 먹성이 좋으며 먹을걸 양손 가득 두 봉다리나 들고 탄, 혈당기를 소지한 한 아줌마께서 타셨다. 먹을걸 정말 끊임없이 나눠주셔서 종일 사 먹을 필요도 없이 배부르게 갔다.


내 위 2층에는 어떤 아저씨가 계셨는데, 이 아저씨가 탈 때부터 나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계속 말을 붙여주시고 열차에 새로운 사람이 탈 때마다 내가 '코레야에서 온 투어리스트'라며 날 소개해주시고 나름 신났는데,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아 나와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려 하셨다. 내가 핸드폰 할 때도 옆에서 딱 붙어 보고 있고, 낮잠도 안 주무시는지 본인의 자리인 2층에도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는 1층 사람이 2층 사람에게 자리를 조금 내어주는 게 예의? 국룰?이다.)


이 분 때문에 빨리 열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모스크바 하면 소매치기, 스킨헤드, 마피아 등등 안 좋은 이미지가 강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모스크바는 매우 깨끗하고 거리 곳곳의 찬란한 조명들이 마음을 울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싶었다.



러시아가 삭막하다는 생각.. 이 사진을 보면 바뀌시겠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 때는 '붉은 화살호'를 탔다. 붉은 화살호는 소련시절 간부들이 타던 열차인데, 외관과 커튼이 독특하고 고급스러웠다. 방에 들어가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 음식과 세면도구가 준비되어 있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열차구나라는 생각에 아쉬웠다. 이 열차에서 놀랐던 건, 같은 칸에 탔던 분들 모두가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울란우데, 이르쿠츠쿠에서는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는데, 서쪽으로 갈수록 영어를 잘하는 러시아인이 매우 많았다.


이름에 걸맞게 정말 붉은 '붉은 화살호' 열차





심심해서 복도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를 보고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거시며, 식당칸에 가서 맥주도 사주고 러시아어도 가르쳐 주었다! 유쾌하고 너무 좋은 분이셔서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열차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사람들은 무뚝뚝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사근사근 말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 무뚝뚝함 속에서 배려가 묻어 나온다.



열정적으로 모국어를 가르쳐주시는 열차에서의 인연


러시아는 에스컬레이터가 잘 되어있지 않아서 나는 매번 20kg가 넘는 캐리어를 들고 수많은 계단을 마주해야 했다. 힘을 주고 낑낑대며 두세 계단만 올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지나가던 러시아 사람들(주로 청년이나 아저씨)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근사근 정겹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무뚝뚝하게 '도와줄게요'라고 말하고 나의 캐리어를 들고 성큼성큼 계단 끝까지 옮겨준 뒤, 쿨하게 떠난다. 기차역이나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은 경우는 신기하게도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여자라서, 외국인이라서, 혹은 내 캐리어가 너무 크고 무거워 보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뚝뚝하지만 친절함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잔에서 만난 러시아인 친구 러스텀은 내가 외국인이라서 친절한 거라고, 러시아인들끼리는 친절하지 않다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기 전에 본 모스크바의 마지막 모습



약 한 달간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느낀 러시아의 매력,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

무뚝뚝한 로맨티스트, 반전매력의 소유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역마다 느낌도 다 다르고, 소속되어 있는 공화국들도 색깔이 독특하고, 사회주의 색깔이 강해서 그런지 뭔가 무거운 느낌이면서도 잘 정돈된 느낌이다. 대놓고 방방 뛰면서 애정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차분하고 은은하게 로맨틱함을 뿜어내는 수줍은 신사 느낌이랄까. 그만큼 문화 예술 건축 조형 언어 자연 등등 온갖 곳에도 멋스러움이 가득하다.


차가운 것 같은데 따뜻한 느낌. 목욕탕에서도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들어가면 쾌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맵거나 짠 음식을 먹고 단 음식을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러시아는 끝없는 반전매력이 가득한 나라이다.

황량한 시베리아 속에 황홀함이 있듯이.



여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전쟁 때문에 여행할 수 없는 러시아,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더 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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