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이 갑자기 오게 된 다합. 모든 걸 다 합한듯한 이 행복감에 떠나는 비행기를 2주나 미뤄버린 건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카자흐스탄행 비행기를 못 탄 게 절망이었는데, 덕분에 적은 비용으로 비행기를 미뤄 다합에 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이유로 날 비행기에 못 타게 했던 그 공항 직원들에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그들 덕분에 예정에 없던 다합에 갔고, 평생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운이 참 좋았다.
다합에 있는 동안 살 집을 본격적으로 구하기 전, 2박 3일간 '캥거루 캠프'라는 곳에 묵었다. 이 숙소 앞에는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바다와 바로 맞닿아있는 공간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주인아저씨께서 이 공간을 특히 자랑스러워하시며 호탕하게 말씀하셨다.
This ocean is all yours! Hahaha
이곳에 앉아서 밤바다를 바라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심신의 안정이었다. 이곳에서의 2박 3일을 보내고, 나는 마을 안쪽의 넓은 마당이 있는 예쁜 하얀 집으로 거처를 옮겨 세 명의 하우스 메이트와 함께 나머지 다합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캥거루 베이스캠프 앞의 작은 바다아지트
다합에서 살 집을 여러 군데 둘러보다가,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비보이인 브루스리가 다합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세계적인 비보이 크루인 갬블러크루 소속인 비보이인데, '댄싱나인'이라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더욱 유명해진 그였다.
당시 그는 반년 째 세계일주 중이었는데, 나와 간발의 차이로 다합 일정이 겹친 것이다. 시샤 맛집인 얌보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일기장에 사인을 받았는데, 팬이라고 다가와주셔서 감동이라고 오히려 나에게 엄청 고마워하셨다. 옆에서는 그가 다합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오, 형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라며 신기해했다. 나에게는 스타인데, 누구에게는 친한 옆집 오빠 형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햇살이 은은히 들어오는 나의 방. 밖에 나가면 햇살이 은은하지는 않다.
다합에서의 일상은 단순하면서 바쁘게 굴러갔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룸메이트가 해주는 아침을 먹는다. 룸메이트는 요리 마니아! 한식을 아주 맛깔나게 잘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오전에는 프리다이빙 강습을 받으러 간다. 원래 프리다이빙 AIDA2 과정은 닷새 안에 끝나는 과정인데, 타고난 몸치인 나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 그보다 오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남들보다 늦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체력장을 하면 30명 중 28등 정도 하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저 이 바다를 재미나게 즐기고 싶었다.
나의 프리다이빙 버디(보통 2인 1조로 강습을 받는다)였던 원석이는 물공포증이 있어 나와 함께 좀 헤매던 터였다. 점심은 바다 앞 제이스 카페에서 먹는다. 나는 주로 햄버거를 시켰다. 버거를 먹고 따사로운 썬베드에 10분만 누워 있으면, 몸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바짝 말랐다.
제이스 앞바다. 이곳에 다이빙 장비를 두기도 하고, 점심을 먹기도 한다.
오후에는 프리다이빙 연습을 하거나 스노클링을 한다. 집에 와 샤워를 하고 나면 어느덧 저녁시간. 아쌀라에 가서 피자를 먹거나, 라이트 하우스에서 중국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집에서 떡볶이나 제육볶음을 만들어 먹었다. 저녁과 함께 한 잔 하고 나면 밤바다를 걷거나, 시샤를 하거나, 다른 집에 초대받아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건전하게!)
다합 마지막 주에는 갑자기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하게 되어, 해지기 전 거의 하루 종일을 바닷속에서 보냈다.
모든 게 귀찮은 날에는 오전 내내 낮잠을 자다가 오후에 나와 자전거를 타거나, 길거리의 개들과 놀거나, 얌보 카페에서 시샤를 했다. 바다 앞 에브리데이 카페의 수변 그물에 앉아 머피(골든 리트리버)를 껴안고 바다를 하릴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하늘이 맑으면 반대편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다합의 홍해바다는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떤 날은 낮술을 하기도 하고, 길거리 상점에서 옷 쇼핑을 하기도 했다. 태닝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마쉬라바(Mashraba) 거리의 상점들
저녁을 조금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날에는 베두인 카페에 가거나 밤낚시를 했다. 베두인 카페는 외딴 마을에 있는 야외 공간인데, 히피처럼 북치며 노래 부르고 맥주 마시고, 밤하늘의 별도 보는 요상한 곳이다. 한 번은 스무 시간 일정으로 페트라를 보러 옆나라 요르단에 다녀오기도 했다.
매주 열리는 금요마켓에도 두 번이나 셀러로 참여했다. 첫 번째는 과일 화채, 두 번째는 김밥. 많은 수익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여럿이서 의기투합하여 직접 장을 봐오고, 요리를 만들고, 그것을 판매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것도 땡볕 아래에서!)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었다.
조직사회에 들어가기 전 먼저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세계일주를 나온 대학생, 여행온 이집트에서 눌어붙어 1년째 살고 있는 영어학원 강사, 아이 둘을 데리고 다합에 거주하며 스쿠버다이빙 강사를 하고 있는 부부, 1년에 여덟 달은 쉬는 날 없이 일하고 네 달은 아예 휴가라 매년 장기여행을 나오는 항해사, 커플 시절 여행을 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집트에 눌러앉게 되어 이집트에서 결혼식까지 했다는 부부 등등..
나의 프리다이빙 선생님은 힘든 박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원 취업 전 휴식 겸 여행 온 이집트에서 프리다이빙의 매력에 푹 빠져 지금까지 눌러앉은 경우였다. 연구원이고 뭐고 지금 바다에서 일하는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하셨다.
어떻게 미국도 아시아도 아닌 이집트의 외딴곳, 다합이라는 곳에서 끈끈한 한국인 커뮤니티가 생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속해 보면 너무나 재밌다. 보통 두 명에서 네 명이 한 집에 사는데,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같이 요리도 해 먹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다합을 떠날 때면 버스까지 배웅도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엮여 살다 보니 친하게 지내는 무리도 형성되고, 그 와중에 연애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냥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합의 주택가 풍경, 저 중 하나가 우리 집.
다합에 온 지 2주가 다 되어갈 때쯤, 이곳을 떠나기가 싫어졌다. 금요마켓 장사도 한번 더 하고 싶고, 프리다이빙도 더 연습하고 싶고, 이제라도 스쿠버다이빙도 하고 싶었다. 다합이 너무 좋아서, 정든 다합을 떠나기가 너무 싫어서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비행기를 미룰까 말까 엄청 고민을 했다. 그런데 마침 카자흐스탄 여행을 같이 하기로 했던 엄마가 갑자기 여행을 못하게 되셔서, 이 참에 나도 다합에 더 있어야겠다 싶어 비행기를 열흘 뒤로 미뤘다. 나는 열흘을 미뤘지만, 이곳이 좋아 귀국을 몇 달 미루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다합의 사람들, 다이빙, 아름다운 홍해, 바다 안, 바다 위, 바다 곁..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무념무상으로 있고 싶을 때, 여행이 후의 삶이 문득 걱정될 때, 친구가 필요할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홍해바다는 언제나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