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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연재 Apr 17. 2023

찾아낸 뽀글이 자매, 멕시코 남동부

두 달간의 중미 여행 (1)

오색빛깔 깃발이 너풀거리는 거리에,
커다란 모자를 쓰고 통기타로
라틴 음악을 연주하는
콧수염 아저씨들이 있을 것 같은,
어릴 적 환상 속의 멕시코였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거리. 내가 생각하던 그 멕시코 느낌.




생각만 해도 오색빛깔 깃발과 라틴 음악이 내 주위에서 맴도는 것 같은 중미, CENTRAL AMERICA!


사실 나는 중앙아시아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중미랑 중앙아시아 중에 어디를 더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만큼 그 둘의 매력이 너무 다르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곳은 중앙아시아보다는 중미다. 중앙아시아는 아무래도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는 극호다.)


그만큼 중남미는 많은 세계여행자들이 꼭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북미로 넘어갈 시간이 빠듯해 남미는 가지 않았지만, 멕시코와 과테말라 두 나라를 합쳐 한 달 이상을 여행했다. 한 나라를 길게 여행하며 그 나라의 여러 지역을 가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도시, 산 미구엘 데 아옌데




멕시코에 가고 싶었던 이유,
잉카 문명과 세노떼 다이빙


언젠가부터 막연히 잉카문명, 마야문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미국 교환학생 때 텍사스에 놀러 갔는데, 멕시코 문화를 잠깐 접하며 이 나라가 궁금해졌다. 뭔가 다채롭고 정겨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홍지선 작가의 '느린 시간의 흐름, 멕시코'읽으며 멕시코에 한 열망은 점점 커졌다.


멕시코를 꼭 가리라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세노떼 다이빙'이었다.


다합에서 만난 다이버 욱현이는, 세노떼 다이빙을 위해 멕시코에 꼭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게 뭔가 하고 찾아보니, '아 이거 너무 내 취향인데?' 싶었다.


세노떼(Cenote)는 석회암이 함몰되며 생긴 천연샘인데, 이에 들어가 수중 동굴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게 굉장히 멋지고 새로운 경험일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바닷물이 아닌 담수에서 스쿠버를 하는 것이다. 세노떼는 성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옛날에는 많은 종교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바야돌리드의 세노떼. 요정이 살 것만 같다.



중미 지역은 치안이 안 좋아 위험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여자 혼자 중미 여행을 하면 '정말 운 좋아야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 말도 여러 번 들었다. 거리를 같다가 칼로 얼굴을 긁히는 일도 부지기수다, 어딜 가든 카르텔이 튀어나온다 등 멕시코에 대해 들은 험악한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나에게 이 말은, '러시아 가면 어디든 마피아가 득실거린다'라는 말처럼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설렘은 두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렇게 나는 2019년 7월, 미국 콜로라도에서 미국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칸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칸쿤에서 시작해 멕시코 동부를 먼저 여행한 뒤, 산 크리스토발에서 과테말라에서 넘어갔다. 과테말라 여행이 끝난 후 다시 산 크리스토발로 돌아와 멕시코 중부 여행을 시작했다.




시작은 칸쿤 (Cancun)
나에게 칸쿤은 = 키아라네 가족


중학생 때부터 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뚜르드몽드(Tour de Monde)'라는 여행잡지를 읽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뚜르드몽드의 한편에 실린 칸쿤의 맑은 바다사진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넘실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신혼여행은 이곳에 가야지!' 점찍어 두었다. 그날부터 칸쿤은 13년간 나의 휴대폰 메모장 한 편의 '꼭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가볼 곳은 많고 휴양지보다는 더 독특하고 험한 자연이 끌렸던 나는, 어느덧 칸쿤을 잊고 있었다.



칸쿤의 찬란한 노을



결혼이란 것을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을 때, 예상보다 빨리 칸쿤에 오게 되었다. 멕시코 여행의 시작을 멕시코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 카우치서핑을 통해 알게 된 키아라네 가족과 만나기로 했다. 칸쿤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에 나오는 순간,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이름이 쓰인 커다란 피켓을 들고 서있었기 때문이다. 푸근하고 선한 인상의 부부, 그리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키아라네 가족이었다.


WELCOME YEONJAE



처음 만나는 나에게 이런 환대라니. 처음 방문하는 나라인 멕시코에서 도착하자마자 이런 감동을 받을 줄이야.


'아, 이 사람들 뼛속부터 따뜻한 사람들이구나.'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키아라는 자연 뽀글이, 나는 인공 뽀글이. 머리가 같아서 더 반가웠던 우리!



프란치스코 아저씨, 카리나 아줌마, 키아라는 나보다도 더 들떠 있었다. 첫날 우리 넷은 멕시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뒤, 호텔존과 칸쿤 바다, 그리고 시내를 구경했다. 칸쿤 토박이인 그들은 나에게 보여 주고 싶은 곳도, 맛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았다. 칸쿤에 머무는 나흘동안 우리는 칸쿤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수많은 사진들을 함께 찍고, 한국과 멕시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게 칸쿤 티셔츠와 동전지갑도 두 개나 선물해 주셨다.


마지막 이틀은 키아라와 둘이 마켓에 가서 멕시코풍의 예쁜 가방을 사고, 키아라가 가장 좋아하는 멕시코 음식을 먹고 버스 터미널에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멕시코 동부의 디저트 마르퀘시타(Marquesitas). 크레페랑 비슷한데, 겉에 파이지가 더 바삭하다. 내용물로 치즈, 캐러멜, 연유, 크림 등을 추가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아저씨는 앞으로 멕시코를 여행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멕시코 가족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여행을 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우리에게 연락해! 나중에 한국에서 또 만나자!



나는 고급스러운 올 인클루시브 호텔에서 묵은 것도 아니고, 코코봉고 같은 유명한 클럽에 간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아라네 가족 덕분에 칸쿤에서 엄청난 활력을 얻었다. 그 나라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냐가 그 나라에 대한 인상을 좌우한다. 멕시코 여행의 시작점에서 함께한 키아라네 가족은 나의 훌륭한 여행 메이트이자 멕시코에서의 가족이었다.


키아라 가족에게 쓴 엽서. 3개 국어로 적어보았다.





플라에 델 카르멘 (Playa del Carmen)
세노떼 다이빙 하나만으로도 이곳에 갈 이유는 충분.




세노떼 다이빙을 예약을 위해 돌아다녔던 플라야 델 카르멘 시내.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이다.



칸쿤의 남쪽에는 Playa del Carmen이라는 도시가 있다. 나는 세노떼 다이빙을 하기 위해 이곳에 갔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가서, 시내의 다이빙 샵 대여섯 군데를 발품 팔며 돌아다녔다. 일정, 다이빙 포인트의 정보를 물어보고, 가격을 흥정해 본다. 최대한 빨리 세노떼 다이빙을 하고 싶었는데, 한 다이빙샵 직원이 나에게 묻는다.


"마침 내일 세노떼 다이빙을 가는 팀이 있는데 거기에 래?"


얼른 가겠다고 했다. 스쿠버 다이빙은 무조건 가이드와 함께 들어가야 다. 가이드비는 N분의 1을 하는 개념이라, 인원이 많이 모일수록 그만큼 저렴해진다. 보통 한 팀은 2-3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왕이면 가이드랑 단 둘이 가는 것보다는 버디(스쿠버 동지)가 있는 게 장비 입을 때도 서로 도와주고, 중간에 쉴 때 이야기도 나누고 좋다.



사진사가 찍어준 도스 오호스 안에서의 내모습



나의 스쿠버 버디는 미국 시카고에서 온 엄마와 아들이었다. 나는 스쿠버다이빙 Advanced 자격증을 갖고 있는데, 나의 버디들은 둘 다 Dive Master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고 했다. 다이빙을 좋아하는 멋진 모자였다. 보통 엄마와 딸은 함께 여행을 많이 하지만 엄마와 아들이 함께 온 경우는 처음 봐서 신기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스쿠버샵 앞에서 만나 다이빙 포인트인 도스 오호스 세노떼로 향했다.


이집트에서는 주로 물고기, 산호 등의 수중생물을 보기 위해 다이빙을 했다면, 세노테 다이빙은 수중동굴을 보기 위한 다이빙이다. 바닷물도 아니고, 물고기도 없다.


다합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는 알록달록한 수생 생물을 눈앞에서 보는 경험을 했었다. 온 세상이 고요하고 오직 바다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세노테 스쿠버다이빙은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 이었다. 수중 동굴을 한두 시간 동안 천천히 둘러보니, 마치 우주 탐험가가 된듯한 기분이었다. 물속은 우주랑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Cenote Dos Ojos 안에서 찍은 사진


긴 여행은 인생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여행도 인생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다.



바야돌리드 광장에서 열린 흥겨운 음악축제와 맥주 한 잔!



알록달록 바야돌리드, 요정우물 세노떼
라스 콜로라다스의 분홍빛 호수 (핑크라군)


바야돌리드에 간 이유는 두 개였다. 세노떼 수영, 분홍빛 호수. 싱크홀 때문에 생긴 석회암 자연 우물인 세노떼는, 멕시코 유카탄 지방에 특히 많다. 이번에는 스쿠버다이빙이 아닌 수영을 하러 갈 생각이었다. (내가 얼마나 담수에서 잘 뜨지 못하는지 이때는 몰랐다.)


호스텔에서 아침으로 후르츠링 씨리얼을 말아먹는 와중에, 나는 오랜만에 나홀로 여자 여행자와 친해지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로라. 영국인이었고, 나보다 열 살이 많았다. 수영을 좋아하는 쾌활한 비뇨기과 의사였다. 그녀는 여름 휴가를 맞아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혼자 여행중이였다.




삶에 있어서는 계획형 인간인 나지만, 의외로 여행을 할 때는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우지 않는다. 바야돌리드 주변에는 세노떼가 너무나 많고, 그 중 어디를 갈지 알아보기 귀찮는데, 마침 로라가 세노떼 옥스만에 간다고 해서 얼른 따라 붙었다.


나 이집트 홍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이랑 프리다이빙을 둘 다 했어. 구명조끼는 필요 없어!


입구에서 빌려주는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호기롭게 맨 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다. 홍해의 짠 해수와 세노떼의 맑은 담수는 뜨는 정도가 아예 달랐던 것이다. 홍해에서 물에 뜨는 것보다 가라앉는게 오히려 어려워서 무게추를 몇 개나 몸에 차고 들어가던 나는, 맹물인 이 곳에서는 발차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라앉았다.


'너 수영 잘한다며! 수영 못하면 구명조끼 입어!' 로라가 날 보고 웃으며 놀렸다. 구명조끼와 함께 용감함을 겨우 장착하고, 타잔놀이를 시작했다. 길다란 덩굴을 잡고 뛰어서 메달려있다가 물 위로 떨어지는 그 순간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수영을 못하면 구명조끼를 입거나, 줄에 메달리거나.




바야돌리드와 시내는 알록달록 색깔이 너무 예뻐서 마치 컬러 테라피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슬슬 라틴 감성을 내뿜는 알록달록 멕시코 색채를 느낄 수 있었다.


라스 콜로라다스의 분홍빛 호수, 핑크 라군 가는 길이 매우 번거롭고 시간도 오래걸려 안갈까도 싶었지만, 분홍 호수궁금했다.


핑크라군은 호수에 일부러 분홍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이 아름다웠다. 이 곳은 무조건 현지 가이드를 동행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단돈 50페소(약 2500원)에 열심히 설명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니 그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다. 안그래도 혼자라 심심했는데, 말동무가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돌아갈 때 터미널까지 타고 갈 오토바이도 매칭해 준다.



가이드의 설명은 다 필요없고 딱 하나만 알아들으면 된다.

'소금 때문에 호수가 분홍빛으로 보인다'는 것.



정제된 예쁨, 메리다


메리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생각났달까? 이름과는 달리, 메리다는 고대 마야제국이 있던 곳이며 아직도 이 지역의 의상과 언어에서 토착 인디언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에스파냐 스타일의 거리와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즈음에 여행 권태기가 찾아와 마야문명 유적지를 적극적으로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즐겁기만 해야할 여행에서 권태기가 가끔 찾아온다는 것이 어찌 보면 복에 겨운 일이지만, 몇달간 여행하다 보면 지치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좋은 숙소를 가도 집이 그립고, 뭘 해도 심심한 시기가 온다.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생겼던 피부 수포 때문에 온 몸이 붓고 컨디션까지 난조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때 현금 2000페소를 잃어버렸다. 여행 짐도 너무 버겁게 느껴져서, 멀쩡하게 잘 입던 원피스를 세 개나 버리기도 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호스텔에 누워있는 와중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영어를 원어민같이 해서 처음엔 미국인인줄 알았는데, 멕시코시티 동쪽에 있는 베라크루즈에서 온 멕시코인이였다. 가 나에게 묻는다.


"멕시코 음식은 먹어봤어도 유카탄 음식은 안 먹어봤지?"

"멕시코 음식이면 멕시코 음식이지, 유카탄 음식은 또 달라?"

"유카탄 전통음식은 옛날 마야족들이 먹던 음식 색깔이 짙어. 따라와!"


그렇게 그를 졸졸 따라가서 먹은 유카탄 음식은, 이때까지의 타코 브리또 퀘사디아같은 멕시코 음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얀색은 Papadzul 소스, 빨간색 Pipian 소스, 까만색 Relleno Negro 소스, 경계에 짜여져 있는건 바나나 퓨레



나의 여행이 인생과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희로애락이 있고, 좋은 일이 나쁜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다 그만두고 싶을때도 있고, 별 것 아닌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이 즐거울 때도 있고, 하루하루가 기대되기도 하고. 인생 자체가 기나긴 여행이라는 말, 참 맞는 말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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