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에 아주 정직하고 착하게 잘 맞추어 자라난 나는 가끔씩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15년동안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건 자신있게 잘 해낸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어딘가 소속이 아닌, 스스로 계획을 짜고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익숙하지 않아 어렵고 부담스럽고 잘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시도했었던 것 같다. 그 내면에는 수동적으로 매뉴얼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고, 기분이 좋아지며, 힘들어도 코피 터지게 열정을 쏟아 붓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편안한 집, 안정된 직장, 튼튼한 자동차…부모님과의 제주에서의 조용한 삶..
안정되 보이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늦은 나이에 독일로가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부딪히는 난관들이 가득할텐데..
너 미쳤구나...
라고 다들 말했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신념이 있었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내가 쥘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얼마만큼은 내려놓아야만 다시 그만큼을 새로 잡을 수가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부딪히고 고민한다. 아마도 인생은 이런 선택의 연속이지 않을까? 육아와 일 사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사이, 하고싶은 것과 해야하는것의 사이, 여자로써로와 엄마로써의 사이,..
혼자서 스스로 모든 정보를 찾고, 결정하고, 목표를 정하고,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해 나가는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범규 사이에서 더 미치지 않았던게 다행일 정도다..
어느 날엔 내가 너무나 약한 달걀이 된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서 깨지고 마는, 열 번, 스무 번을 해 보아도 언제나 똑 같은 결과…깨지고 만다는…..그래서 좌절스럽고 기운이 다 빠지고, 얼얼해 지는…
그러다가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신념!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
" 계란은 깨져야 계란후라이가 되든, 오믈렛이 되든, 빵이 되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깨지는게 두려워서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날계란으로 예쁘게 있다가 썩게 되지 않겠어?
그러니 괜찮다..이렇게 계속 깨지다 보면 그게 모여서 맛있는 정식 음식이 될 것이다!
나의 스승의 일을 도울 때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자 차차 적응이 되었고 내 안의 내가 좀 더 스스로 자란 듯한 느낌이다.
"배움이란, 무언가를 더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들어있는 것을 찾아내어 꺼내는 것이다"
나의 스승은 특별히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씩 함께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오래된 책을 함께 읽고, 보드게임을 한다. 스승님과 오랜 시간을 가까이에서 보니,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공유와 커뮤니케이션, 우정과 신뢰라고 믿으신다. 일과 돈은 그 다음이다.
잘 만든 놀이터, 잘못 만든 놀이터, 좋은 공간, 숲 등을 산책하고 살펴보고 서로 의견을 나눈다. 함께 일을 할 때도 너가 받아야 할 수고료는 너 스스로 책정하라고 하신다. 자신이 노력하고 애쓴 정도는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대가는 자신이 책정하는 것이 맞다.
내 나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에 놀이터를 지을 때는 의뢰인의 의견 외에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자주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그리고 다른 나라에 대해 함께 책도 읽고 이야기 나눈다. 누군가 먼 곳에 여행을 갔다왔다고 하면 어서 달려가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참 재밌다.
어느 날, 내가 대학에 다시 가서 디자인을 배워볼까요? 하니,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한다.
독일도 마찬가지, 학교에 가면 정형화된 이론에 끼워 넣어져서 내 자신의 색깔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신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내면에 있는 것을 꺼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Learning by doing“
이제는 자꾸만 한국으로 가서 일하라고 하신다.. 바보 같은 놀이터들 제발 좀 가서 바꾸라고…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은 거 같은데.. 아마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 해야 한다는 한국에서의 교육방식에 젖은 부분이 다 마르지 않아서 인가 보다.
동네 초등학교에 스승께서 디자인한 놀이터를 둘러보러 갔다가 교장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마침 쉬는시간이 되어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서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선생님 중 한 명은 운동장 한 구석에서, 또 다른 한 명은 2층 창문에서 바라만 보신다. 옆에서 뛰지 말아라, 올라가지 말아라 참견하며 놀이를 방해하는 어른은 없다. 한 아이가 울면서 찾아왔다. 조용히 무슨일인지 묻고 무릎에 난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니 아이는 다시 놀러 돌아갔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인상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