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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재 Jun 08. 2021

11살의 어린이날- II

고장난 전자렌지와 사다리

앞 글에 이어 이야기 둘.....


강민이는 온 힘을 다 쏟아내고,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나니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동네는 조용했다. 아침 일찍 이 집 저집 모두들 특별한 날을 위한 외출을 간 모양이였다. 반면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빈둥빈둥 이 조용함을 즐기고 있었다. 해먹에 누워 흔들거림에 스치는 로즈마리 냄새를 맡다가 문득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귤쥬스를 얼려놓은 기억이 났다.

 강민이는 혓바닥을 최대한 내밀면서 아주 조금씩 녹고 있는 귤쥬스를 열심히 먹었다.

온 감각이 혓바닥에 집중되는 용쓰기!

그 모습을 보면서 나의 국민학교 시절, 학교 앞에서 팔던 50원짜리 얼린 요구르트를 아랫부분을 뜯어내고 먹었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돈을 더 모아서 두 배 큰, 오렌지맛 조아 요구르트를 먹으면서 가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어찌나 행복했던지 떠올랐다.

요즘 세상에는 모든게 편리해지고 불편한 제품은 팔리지가 않으니 최대한 먹기 편하게, 간편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아마도 얼린 요구르트를 보면 지금의 아이들은  "이거 어떻게 먹어요? 이거 따 주세요. 저 못해요.” 등등잠시 고민해 볼 시간조차 가질 생각도 하지 않고 어른에게 해달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린 어릴적에 누군가가 먹는 방법을 알려줬을까? 왜 옛날에는 쮸쥬바나 아이스바보다 먹기도 힘들고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얼린 요구르트가 더 인기가 많았던 걸까?

얼린 500ml 생수병에 얼린 귤쥬스를 힘겹게 먹고 있는 강민이를 보면서 그 답을 알았다. 

그건 바로 ‘작은 성취감’이다. 

엉킨 목걸이를 시간을 들여 풀었을 때의 기분, 안 나오는 코딱지를 겨우겨우 각도 조절하며 꺼냈을 때의 기분, 징검다리를 모두 건너왔을 때의 기분,.. 스스로 도전해서 얻게 되는 작은 성취감말이다. 이 작은 성취감들이 모여서 용기를 얻게 되고 자신감이 키워진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작은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필요하다. 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강민이 아빠가 확실한 정점을 찍어주는 행동을 했다. 안간힘을 쓰며 한 모금씩 꺼내 먹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답답했던지 가위를 가져와서 입구를 크게 잘라준 것이다. 이런 편리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아이가 과연 몰랐었을까?

전혀 아니다! 사실 아이는 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였다. 어른의 눈에 비치는 답답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행동은 아이에게는 재미있고 감칠나는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아빠가 편하게 먹도록 입구를 크게 넓혀 주었더니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많이씩 먹을 수 있는데 재미는 없는 상황

처음에는 갑자기 편해지고 빨리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반가움에 잠시 기뻐했다. 그리고 두 입을 먹더니 더 이상 먹지 않았다. 놀이는 끝이 났다. 어른이 아이의 놀이를 방해한 것이다. 

제주도의 5월은 햇살이 벌써 따갑다. 하지만 이런 날엔 일광욕을 즐기고 이불을 햇빛에 구울 수 있어서 좋다. 5월 5일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마당에서 간편하게 브런치를 먹었다. 주말마다 먹는 똑같은 메뉴인데, 해먹에 누워서 먹는거라 그런지 더 맛있었다. 격식과 규칙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훌륭한 반찬 역할을 해 주어서 인가보다. 대단한 것 없이 구운 베이글에 버터와 쨈을 바르고 바나나와 우유를 갈아 넣은 바나나쉐이크 한 잔!

한가로운 특별한 어린이날

배도 부르고 심심함이 극치에 다다랐을 때 즈음, 나는 진짜 선물을 가지고 나왔다. 

바로 사다리다! 발디딤판이 광폭이면서 가장 높은 사이즈를 골랐다. 

독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던 때가 강민이가 8살때였다. 기본적으로 항상 7명정도는 살고 있는 3층의 한 가정집이고 집주인인 헬무트는 인지학 교육사업가였다. 한마디로 굉장히 똑똑한 할아버지다. 독일은 왠만하면 모든 집수리를 직접 한다. 그래서 공구나 목공기계등 왠만한 기구들은 각 가정마다 가지고 있다. 이집에도 예외없이 많은 공구가 있었고, 그 중에 강민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 사다리였다. 낮이고 밤이고,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이리 저리 둘러보고, 특히 밤에 별보는 걸 좋아했었다. 사람이  없는 날에는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몸으로 사다리 위에 앉아있고는 했다. 그런 자유스러운 모습이 참 존경스러우면서 즐기고 있는 행복감에 나는 흐뭇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올라가 하늘을 올려다 보던 8살.

그런데 문제는 사다리를 세울 수 있는 곳이 야외 테이블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이므로헬무트는 사다리를 자주 접으라고 했다. 사다리를 접어야 할 때마다 ‘엄마, 우리 다른 집으로 이사가자! ’ 라는 말로 얼마나 아쉬운지를 표현하곤 했다. 지금 당장 사다리를 사 줄 돈은 있다. 하지만 내 공간, 우리 공간이 없다. 그래서 서운하고 서러워도 참아야 한다. 

강민이 11살이 되었고, 비록 빌린 집이지만 온전히 우리만의 집이고, 우리만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사다리를 꼭 사주고 싶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았을 그 시간을 연장 해 주고 싶었다.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시나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가서 한참을 하늘을, 구름을, 나무를, 이웃집들을 둘러보았다. 다음날에는 과자와 음료수를 들고 가더니 한 칸 아래를 보관함처럼 사용하면서 느긋하게 간식타임을 즐겼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집 안으로 들여놓는다. 거실 한 켠에 자리잡은 사다리는 게다가 굉장히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거실에서도 사다리에 올라가서 TV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한다. 

어느 날, 잠시 놀러오신 외할아버지 눈에도 궁금하셨는지 올라가신다. 우리집 강아지 마루도 세 칸 까지 올라가서 형을 올려다본다.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고, 빠데작업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좋은 선물!

참 신기하다. 사다리는 움직이지도 않고 무얼 내어주지도 않고, 알록달록 색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차갑고 정지 상태의 물건일 뿐인데 멋있다. 올라가 보고 싶고, 한 발 올라서면 튼튼함에 매료되어 점점 더 올라가고, 꼭대기에서는 산을 정복한 마냥 뭔가 뿌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강민이는 오늘보다 내일 더, 다음달에 더, 내년에 더 자주, 다양하게 오늘의 선물을 찾을 것이고 활용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필요하고, 삶에 도움이 되고,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눌 수도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이런 유용하고 고마운 선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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