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살아남기
이렇게 어려운 숙제가 다 있나!
나는 음식 잘못 샀다가 맛없으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슈퍼에서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특히나 처음 보는 식품들로 가득찬 백화점처럼 커다란 슈퍼에선 더군다나 식은땀이 날 정도다.
나는 치즈를 좋아한다. 오~ 냉장코너에 가보니 수십가지의 치즈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치즈는 까망베르, 모짜렐라, 고르곤졸라, 체다 정도다. 치즈를 좋아해서 우연히 맛있는 치즈를 만나면 기분 좋게 잘 먹지만, 깊이 파서 공부해가면서까지 종류를 외우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 그런 스타일의 나는 예상되다시피 슈퍼에 갈 때마다 치즈코너를 반드시 들르고 서성이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후부터는 도전하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날 마음에 드는 그냥 내가 보기에 맛있을 것 같은 치즈를 하나씩 집었다. 그리고 계산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다. 보통 계산대 앞에서도 고민하다가 빼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참 답답하고 쫌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사온 식품이 맛이 없어도 나는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다 먹어야 하는 괴로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중을 가하는 것 같다. 맥주는 수 백, 수천가지의 종류가 있고, 정육 코너는 원하는 부위를 명칭과 두께와 양을 주문해야 준다. 도대체 삼겹살은 어떤건지.. (결국 고기 명칭은 공부해서 외웠다!) 요거트의 종류도 무지 많아서 한참 걸린다. 지방 함유량, 첨가물, 유통기한 보는 법, 게다가 모든게 독일어.
글자가 아니라 그림처럼 보였으니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나고 수학문제를 못 풀던 기분이다.
한 가지 좋은건, 틀려도 괜찮은 숙제라는거. 대충 빨리 풀어도 되고, 오래걸려서 꼼꼼하게 풀어도 되는 남에게 평가받지 않는 숙제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슈퍼에서 천천히 꼼꼼히 둘러보는 편이다. 이런 나를 보면서 내 아들은 무지 답답해한다. 뭘 그렇게 자세히 보느냐고, 엄마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아들아, 나도 독일이 처음이라 그래. 너랑 나랑 먹을 건데 잘 보고 골라야 하는데, 글씨도 모르고, 어떤 식품인지 모르니까 좀 오래걸리네. 좀 이해해주라."
모를땐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된다. 강한 척, 다 아는척 안해도 된다.
엄마도 모를 수 있고, 못 할 수 있고, 어려울 수 있고, 힘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관찰하면서 솔직한 대화로 조금씩 알아가고 더 가까워진다.
P.S. 치즈에 대해- 결국 1년 반 이후에 드디어 가장 좋아하는 치즈를 찾았다! 스페인 치즈 Manchego!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어서 보일때마다 사 둔다. I love Manchego!
나는 살아남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갔다. 우체통에 오는 신문지는 한 개인데, 두께가 굉장히 두툼했다. 신문을 좀 읽어볼까 펼쳤더니 역시나 머리가 아프다. 사진만 보고, 큰 글씨만 보면서 넘기다 보니, 그 두꺼운 두께를 유지했던 전단지들이 나왔다. 각종 슈퍼마켓의 전단지였다. EDEKA, REWE, ALDI, LIDL, NETTO, NORMA... 드럭스토어인 DM, ROSSMAN, MÜLLER..
나는 전단지의 세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전단지를 몇 시간씩 정독을 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고, 필요한 쿠폰을 오려놓고,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추천하는 식품이나 화장품 들을 적어놓거나 비교하고 정말 열심히 읽었다. 오전에 다 못 봤을 때는 저녁시간에 강민이와 둘이 앉아서 독서 시간을 가졌다. 강민이는 처음엔 별 호기심이 없다가, 내가 이리 열심히 살펴보고 대박딜을 보면 유후~ 하며 신나하니 같이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강민이는 주로 고기, 소세지, 아이스크림, 장난감, 젤리 종류를 찾았다.
뭐 여러개의 잡지(?)이니 서로 돌려가며 보고 마음에 드는 걸 서로 의견을 나누고, 체크하고 기대하고 같이 직접가서 찾아보는 재미가 생겼다. 우리 둘의 공동작업이 생긴 것이다. 생계를 위한 작업. 생각해보니 독일어 공부의 절반은 슈퍼 전단지로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점이 나타가기 시작했다.
슈퍼마다 가격도 다르고, 매주마다 세일하는 상품이 달라서 내가 필요한 게 어디가 더 저렴한지 비교해보고 목록을 작성해서 슈퍼에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장을 보려면 슈퍼를 최소한 3군데는 가야했다. 매일 가는 동네 슈퍼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이 자전거로 30분씩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슈퍼와 드럭스토어에서 파는 종류도 달랐기 때문에 슈퍼 2군데, 드럭스토어 1군데 거의 투어 수준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였다. 나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였고, 가지고 다니는 가방과 바구니에 넣는 양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스포츠 의류매장에 가서 30Kg 용량의 질기고 튼튼한 배낭을 하나 샀다. 그리고 장보기의 양은 이 배낭 30kg에 들어가는 만큼만 사는 걸로 정했다. 가방에 가득 담겨지면 어깨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시간이 흐르니 요령도 생기고, 왠만한 빅데이터가 저장됐다. 아이스크림은 어디에 맛있는게 있고, 두부를 사려면 유기농마트인 BioMarkt로 가고, 블루베리철에는 Edeka에서 3kg 짜리 바구니를 통째로 사서 먹는 등, 왠지 살림 잘하는 엄마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시간을 많이 들게 되지만 이것이 다 공부다~ 잘 먹는게 남는거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면 그 또한 즐거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2년 정도 지나면 전단지에서 진짜 엑기스와 낚시광고 정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오늘도 숙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