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_12 NOV22
2020년 가을에 방영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몇 가지 면에서 주목받았다. 지금에서야 찾아보니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이력(주인공 송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이 바이올린과 경영을 전공한 사람이었다는 것,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속한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근무한 일 등)은 이미 내가 짐작했듯이 드라마를 홍보하는 데에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소위 '월드 클래스 피아니스트'는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동안 주목받아온 몇 사람의 피아니스트의 이미지를 합친 것이라지만 대부분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떠올린다.
내가 좋아한 이 드라마는 작가의 이력과 그리고 실존하는 멋진 피아니스트의 실제 이야기 같은 착각도 들게 해서 나름 홍보하기 좋은 조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작가 자신이 '이것은 실제 이야기가 아니며 저는 이 드라마 속의 여성 주인공이 아닙니다.'라고 밝혔지만, 이야기는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에 기반한 것이어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주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포함시킨 것인지,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최소한 작가 자신은 알 것이다.
찬사가 가득한 드라마 리뷰를 쓰려던 내 생각은 최근에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조금 바뀌었다. 잘 만든 드라마이고 또 드라마 음악으로 발매된 음반도 정말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 극본에서 주인공 송아와 준영이 현실에서의 드라마 작가 자신 그리고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전혀 아니라면 작가는 어쩌면 심각한 실수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의 마음은, 조금은 배 아프겠지만, 이 드라마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것이기를 바란다.
송아라는 인물은 사실 작가 자신이 공개하는 이력과 80% 이상 일치한다. 송아가 음대에 진학하기 위해 4년간 노력했다는 부분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부분은 사실 중요한 내용은 전혀 아니다. 드라마의 제목은 해외의 동명 소설에서 가져왔다고 치고, 또 그 소설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쯤은 그냥 넘기더라도 만일 이 드라마가 책이었거나 논문이었다면 아마 심각한 '표절'의 범주에서 논쟁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작가 류보리 자신의 필모그래피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현실과 지나치게 중첩되기 때문이다. 내가 적어두고 싶은 것은 그래서, 멋진 그 로맨스가 정말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를... 그렇지 않다면, 스물아홉이 되어 브람스 연주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에서 플랑크 소나타를 연주한 조성진의 최근 행보로 볼 때 2022년의 일정을 알고 있었던 매니지먼트 회사가 2020년에 그의 계획을 미리 공개해 버린 것과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와 같이 조성진은 최근 브람스 작품 연주 앨범을 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자주 등장한 그 플랑크 소나타를 연주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으레 하는 연주곡이거나 작품이었어도 그 우연성만으로도 이야기될 만한데, 이건 뭐 조성진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사적인 것 공적인 것 할 것 없이 너무 드러나 있다.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아이디어로 소설을 쓰고 극본을 쓰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는 대상이 되는 인물에게 어느 정도 허락은 받아야 될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그래서 작가 자신이 분명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나 인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피아니스트의 2022년 계획이 2020년 가을에 미리 드러나 버린 이 우연의 일치를 생각해보면 내 입장이라면 조금 더 그 피아니스트를 배려했을 것 같다. 물론 전혀 다른 의도였다면 이해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오히려 박준영을 통해 조성진을 더 대중 속으로 끌어주고 싶었다거나 하는 의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작가와 그 피아니스트가 같은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일한 적이 있고, 올해 연말 미국행이 예정되어 있는 조성진의 현실세계를 살펴보면서 드라마의 줄거리가 실제 이야기이기를 혼자서 기대해 보는 것이다. 아니라면, 이 드라마에서 작가 자신의 순수한 플롯과 아이디어는 과연 얼마쯤일까 의심이 든다. 드라마를 세 번쯤 정주행 해서 다시 보고, 다시 보고, 또 오늘은 조성진의 연주 일정표를 확인하면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음대생들의 이야기를 아주 현실감 있게 썼다'라고 생각했던 드라마 작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반감된다. 이 작품은 이미, 매우 창조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하지만 어떤 일을 오래오래 꾸준히 해 본 사람들이 받아야 할 존경과 찬사, 부러움의 대상을 좋은 극본으로 정말 잘 정리해 준 점은 인정하고 싶다. 하루에 할 일, 한 달 안에 할 일, 일 년 안에 할 일들을 빼곡히 적고 몇 번쯤 시도해 보면서도 정작 꾸준히 해 본 일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실황연주라는 무대는 정말 꿈도 못 꿔 볼 일이다.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내를 가진 사람들인지는 피아노 바이엘 단계만 배워본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연주자들이 새삼 어느 전문가들보다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재능과 노력,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예술분야에서 꾸준함은 왜,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대단한 성품인지를 느낀 바이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나 악기나 그 어떤 것이나 분야이든, 10대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자신의 재능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가꿔 나가는 그 '눈'과 노력이 가장 대단해 보인다. 이십 대에도 삼십 대에도 재능은커녕 무엇을 할지도 몰라 갈팡질팡하기만 했던 나의 청춘시절을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도 어떤 일을 선택할 줄 알았고 그 선택한 일에 집중할 줄 알며, 끝까지 인내하는 연주자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월드 클래스가 되는 것이겠지.
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드라마 작가인 류보리와, 내가 좋아하는 배우 박은빈, 김민재가 부러웠다(김민재는 이제 나에게는 피아니스트 박준영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작가, 배우... 인생의 어느 순간에 깊이 고민하고 단호히 선택하고 그리고 그 선택에 몰입해 본 사람들. 어떤 일에서든 그렇게 선택과 집중, 그리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정말 멋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