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_ [비와 당신]
영화에서 주인공이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그 영화배우를 가수로도 만들어 준 <비와 당신>, 최근에는 인기있는 한 드라마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다시 인기를 끌었다. 비오는 날에 어울리기도 하고, 조용히 듣기에도 좋은 적당히 차분한 노래라서 나도 좋아했다. 그리고 바이엘을 배우는 중에도 겁없이 이 곡을 연주해 보겠노라고 비장하게 도전했다.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다. 악보를 준비하고 피아노 위에 먼지 풀풀 앉도록 올려두고 1년이나 지났나 보다.
연주가 어려운 곡은 아니었다. 오른손은 검은 건반만 잘 맞추면 되었고, 왼손도 어렵지는 않더라. 그런데, 피아노 연주라는 것이 참, 내가 좋아하는 곡을 양손으로 머그컵 들고 해바라기하면서 듣는 것과, 음표 하나 하나 세어가며 높은음자리표인지 낮은음자리표인지 연신 위아래 확인해 가며 건반 하나 누르는데 몇초씩 걸리는 시간을 참아가며 직접 연주해 보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종종 일할 때 광고없는 피아노 연주음악을 틀어놓을 때가 있는데, 그 피아노 선율만큼 아름답게 치려면 최소한 절대 건반 '삑사리'는 없어야 하는 것을. 어떤 노래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참아줄텐데 피아노를 배우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가 보다. 할 수 없이 왼손 반주는 1-5-8, 1-5-8 간단버전으로 도전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맛이 안 난다.
어제 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몇 편을 보고야 말았다. 이번 주말은 밀렸던 일들이 산더미보다 더 많아서 어쩌면 금, 토 이틀밤은 잠도 못 자겠구나하고 계산해 두었는데, 몇 시간을 드라마 보느라고 날렸으니 이제 망했다. 어제는 왜 갑자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피아니스트 박준영, 아니 김민재가 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드라마를 방영하던 때의 나의 시간들은 정말 우울하기만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민재가 하필 피아니스트 역할을 맡았는데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인 박준영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지만 자신만의 우울한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민재는 얼마나 연기를 잘 했는지, 나는 마치 김민재가 원래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을까, 박준영보다 인간 김민재에게 매력을 더 느끼고 말았었다. 김민재의 손끝 디테일, 말투, 옷차림이 정말 피아니스트 같아서 헤어나오는 데 한참이 걸렸던 드라마. 김민재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배우들이 '디테일'을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이 거기에 전도되기도 하고, 나처럼 마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열여섯에 느낄 법한 로망, 나는 그것을 김민재에게서 느꼈었다. 피아니스트를 연기하는 김민재에 몰입한 나를 누가 보았다면 미쳤다고도 했겠지.
어쨌든 그 드라마가 끝나고 다시 피아노를 배워보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피아노 학원을 정말 찾았었다. 여타의 취미가 없는 일상을 사는 사람이다보니, 일주일에 두어 번 더듬거리고 뚱땅거리는 레슨시간과 연습시간이 아주 좋았다. 이후, 몇 가지 생활의 변화가 없었다면 레슨을 계속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몇 가지의 변화에 대응하느라 피아노와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나서 1년이 지났다는 것을 조금 전에 확인했다. 몇달 짬을 내어 연습해 보던 피아노 건반을 만지지도 않은 것이, 아니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기가 작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전후였으니 말이다. 시간은 왜 화살같이 가는가. 러시아의 과학자 류비세프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기고, 그 시간들을 최대치로 사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인데 류비세프만큼 기록과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30분, 1시간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그리 어려웠다는 말인가. 꾸준히 했더라면 <비와 당신> 정도의 악보는 단번에, 그리고 단숨에, 틀리는 건반 없이 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피아노에 입문하고 1-2년이면 몇몇 대회에 나가서 곧잘 상을 받는 어린 아이들의 끈기와 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디테일의 힘을 믿어야 한다. 작은 시간들의 힘은 크다. 자투리 시간들이 모여 중요한 습관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하나의 성과나 결과로 이어지는 그 시간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도전했을 때에도, 새벽 산책을 다니자고 다짐했을 때에도, 독서 시간을 따로 만들자고 생각했을 때에도... 나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겠노라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더랬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도전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작심하루였던 것이다. 그나마 버티고 버텨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했던 일들은 생활과 관련되었거나 사회적 시스템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했던 일들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졸업인증제 같은 것들을 위해서 거친 과정들 말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내는 것은 소위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는 겉보기 의도로는 결과를 낼 수 없는 일들인 것 같다. 내가 얼마나 하고 싶은가, 진정 원하는 일인가의 정도에 따라 인내심을 발휘해야 결국 해 낼 수 있는 일. 피아니스트를 동경했던 나는 어쩌면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멋진 모습에 반해 그 자체만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 진정 음악을 좋아해 보았거나 진짜 열정을 품어본 적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1년 전 <바이엘>을 넘어 <체르니100> 단계라는 중초보의 단계에 진입했었다. 초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그만둔다는 그 <체르니100>단계 말이다. 책을 다시 들춰 1년 전 연습했던 체르니 몇 곡을 쳐보려고 했더니 아뿔싸, 내 수준은 어느 새 다시 바이엘로 돌아가 있다. 언젠가 도전해보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는 마룬5의 <메모리즈>나 조지 윈스턴 버전의 <캐논 변주곡>은 다시 멀어져 버리고 말았다.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은 연주자의 힘 조절과 정확한 손놀림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 중요한 디테일의 힘을 무시할 뻔했다. 그리고 거만하게도, '피아노는 음악으로 들으면 되지, 굳이 내가 연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포기할까' 생각했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의 문제인데도, 내가 좋아서 해 보겠다는 표제를 달고도 나는 작은 산 하나 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해가 가려나 보다. 멍때리는 시간도 많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할 수 있었을 때 하지 않았다. 게으름에 대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는 초겨울이 될 것 같다.
문득, <비와 당신> 음악이 나왔던 영화 <라디오 스타>의 줄거리가 생각난다. 힘든 시간을 버티는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생의 시간은 축복받아야 한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일도 장한 일이고. 곤이에게처럼 나의 재기를 믿어줄 사람은 없지만, 나 스스로를 응원해 주자. 이 시기가 지나면 한번쯤은, 한곡쯤은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니 초보 또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이 야심찬 계획을 포기하지 말기로.
2023/ [캐논까지 느릿느릿]/ [계절의 오행](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