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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Jul 26. 2019

지독하게 폭력적이고 미약한 인간에 대해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2016년 영국 맨부커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예전부터 봐야지, 하고 책 목록에만 저장해 놓고 있다가 지난주 드디어 완독하게 되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그 강력한 매력에 몰입되어 순식간에 페이지를 슥슥 넘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싶다가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고마운 소설이다.


이 책은 3개의 연결된 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하나로 묶은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끊고 (남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영혜'를 중심으로, 그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각각의 소설이 2년의 시차를 두고 진행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각각 인간 군상의 어떤 측면--상처 받고, 번민하고, 변명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세 가지 다른 스토리를 담고 있는 듯 하지만, 이들을 모두 연결했을 때 새로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드러난다. 작가도 세 작품이 하나로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나는 각각의 단편 소설에 대해 리뷰하기보다는, 세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여 등장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로부터 느낀 바를 쓰고자 한다.




책의 제목이자 연작소설의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인 '채식주의자'는 세 소설을 관통하여 등장하는 주인공 '영혜'를 가리키는 단어다. 사실 영혜는 한 번도 자신을 '채식주의자'라 명명한 적이 없다. 일순간 고기를 끊고, 몇 년의 시간을 거쳐 나무가 되어가려 하는 영혜를 타인이 '채식주의자'라 규정한 것이다.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도 영혜는 화자로 나오지 않는다. 영혜는 다른 등장인물이나 작가에 의해 관찰되고 묘사되고 해석될 뿐이다.


특별할 것 없이 모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영혜는 일순간 어떤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다. 영혜의 꿈들은 피, 고깃덩어리, 살생, 피 웅덩이에 비친 익숙한 듯 낯설고 살벌한 얼굴의 이미지를 담은 괴기하고 끔찍하고 추상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 꿈의 밑바닥에서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자기 집에서 키우던 개가 영혜를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화를 샀고, 이에 대한 대가로 아버지는 그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마을을 수 바퀴 돌며 개를 서서히 죽인 후, 개고기를 해서 잔치를 벌였다. 영혜는 집 앞에 서서 한 바퀴, 두 바퀴,... 일곱 바퀴를 돌며 서서히 죽어가는 개의 몸과, 얼굴과,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통에 서서히 죽어가는 한 생명을.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키우던 개를 끓여 만든 고깃국을 맛있게 먹었지만, 그 날의 기억은 영혜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잊히지 않고 묻어져 있었다.


갑자기 냉장고에 있는 모든 고기와 유제품, 계란까지 버리고 채식을 시작한 영혜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영혜에게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딱 한 명, 영혜의 형부뿐이다. (그마저도 형부가 영혜에게 불가해한 욕망을 품은 뒤다.) 영혜의 남편, 부모, 형제자매 모두 '왜' 영혜가 고기를 멀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고,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고, 강요하고, 윽박지르고, 억지로 입에 쑤셔 넣고, 거짓말을 하며 먹이기까지 한다. 가족들은 영혜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폭력이다. 어쩌면 영혜는 자신이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행했던 지구 상 모든 만물들에 대한 '폭력'에 속죄하기 위해 식물이 되어갔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영혜가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까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이유, 자신의 젖가슴을 그토록 좋아하고 그 젖가슴을 구속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p. 43)다. 인간의 다른 신체기관은 무엇이든 헤치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젖가슴은 반대로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고 살리는 기관이다. 암컷이 생명을 잉태했을 때 암컷의 가슴은 젖을 만든다. 그 젖은 갓 태어난 아기의 유일한 식량이 되어 성장을 돕는다. 젖가슴은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기관이기에, 영혜는 그토록 이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속박하고 싶지 않았고, 가리고 싶지도 않았다. 젖가슴은 비폭력의 상징이다.


영혜의 고통을 누구도 공감하지 못한다. 혹은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살생의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을 매일 밤 꿈에서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강요당하는 고통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남편과 가족들조차 공감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강압에 맞서 영혜가 자신의 손목을 그었던 그 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혜는 형부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 어렵지는 않지만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담담히 대답한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깊이 모를 상처와 음울함을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신은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철저한 타인'이라는 것을.


아마도 인간이 계속해서 폭력을--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저지르는 이유는, 폭력을 당하는 대상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보다 연약한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치기 어린 청소년들도, 부하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직장 상사도, 수화기 너머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담원에게 갖은 욕설과 험담을 늘어놓는 것도, '다 너를 위해 그런 거야'라며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지도 않은 아이들을 똑같은 벼랑 끝으로 내모는 부모와 학교도... 그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의 연결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타인의 것이다. 남의 일이다. 내 일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 현대 사회는 극심하게 분절되어 있다. 자급자족하던 시절에는 내가 키운 곡식, 채소, 그리고 가축을 통해 먹거리를 얻었다. 오늘날 내가 먹는 밥상에 차려지는 음식이, 내가 쓰는 수많은 물건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나에게 오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 혹은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내가 매일 쓰는 종이, 목재,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매 초마다 축구장 반 개 면적의 숲이 사라지고, 동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지구온난화가 심해지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열대우림을 갖고 있는 브라질이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걱정해야 될 일이다. 내가 편하게 쓰고 버린 일회용 플라스틱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 가 거북이와 새의 가슴팍을 조아 생의 끝을 재촉하는 것도 내 일이 아니다. 내가 매일 맛있게 먹는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기계적으로 태어나서, 다섯 발자국도 걷지 못할 작은 울타리에서 길러지고, 잔인함이라는 개념조차 거세된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동물들의 고통은 내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괴리되어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과 괴리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려 하지 않고, 소통하려 하지 않고, 연결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폭력을 행사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혜의 남편인 '정서방'은 극 중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시점으로 첫 번째 소설 <채식주의자>를 이끌어 나간다. 그는 시종일관 '나'의 생각과 심리, 행동, 내가 바라보는 타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해석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한편 그는 스스로의 모순을 육성으로 발화하는, 극 중에서 가장 솔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틀에 자신을 깎아 맞추어, 특출 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무난한 삶을 살고자 하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닮았다. 자신의 열정과 꿈을 키워줄 학교가 아닌 넉넉한 장학금을 주는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대단치 않은 능력을 귀하게 여기는 작은 회사에서 소박한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데에 만족했으며, 열렬한 사랑이 아니라 특별한 단점이 없어 보이는 여자를 아내로 선택했다.


그가 아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에는 은근한 멸시가 느껴진다. 아마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그를 쉽게 비난할 수 없다. 5년 간 함께 산 아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고, 고기를 권유하는 가족에 맞서 자해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그는 아내와 법적인 타인이 되고자 결심한다. 영혜의 가족은 그가 불쌍한 영혜를 버렸다며 비난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종일관 말한다. 자신은 그녀를 모른다고. 변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마도 그는 그녀에 대해서,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두 번째 소설 <몽고반점>은 세 편의 연작 소설 중 가장 충격적이고 관능적인 이야기다. 보는 관점에 따라 예술과 외설, 정상과 비정상, 본능과 사회적 관습 사이의 경계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혜의 형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몽고반점>의 이름 없는 주인공인 '그'. 외부인이 보기에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처제와 몸을 섞고 그 장면을 영상에 담기까지 한 정신이상자, 가정파탄자 혹은 성범죄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리 묘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열망해온 것은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포르노그래피라기보다는,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그 어떤 것에 가깝다.


그는 영혜의 첫인상을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p. 78)고 회상한다. 그가 처제인 영혜를 달리 바라보게 된 것은 그녀가 성인이 된 뒤에도 엉덩이 한쪽에 몽고반점을 갖고 있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듣고 난 다음부터였다. 몽고반점은 그만큼 그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었다. 그에게 몽고반점은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p. 87)이다. 그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문명사회 그 이전의 태고의(primitive) 이미지에 홀린 듯이 빠져들어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처제의 몽고반점을 보고 이렇게 느낀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p. 101)


자신의 처제인 영혜를 대상으로 성욕--혹은 근원적인 무언가와의 교접의 충동--을 느끼는 그는 스스로를 환멸하고 자책한다. 현대 사회에서 친족을 범한다는 것은 금기이고, 그도 그것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원초적 본능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소설의 구석구석, 번뇌와 환멸, 고통을 느껴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급기야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그의 내적 갈등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결국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머릿속에 맴도는 그 이미지를 실제로 실현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는 결론짓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그 일을 행하고 만다. 자신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예감했다. 소설의 초반부에도 나오듯, 그 파멸적 결말을 그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상상한 그 이미지를 모두 실현하고 난 다음날 아침, 그는 불현듯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p. 147)


인간은 모두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추악한 욕망을 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갈 뿐이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그 욕망을 기어코 표출해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그러한 욕망을 가진 것 자체를? 욕망을 실현한 용기를? 혹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결과를?




세 번째 소설 <나무 불꽃>의 주인공 '인혜'는 영혜의 언니다. 그녀의 이름은 책을 통틀어 딱 한 번 나온다. 영혜가 입원한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는 전화가 왔을 때. 그 외에 모든 장면에서 그녀는 그저 누군가의 딸이자, 언니이자, 아내이자, 엄마다. 그 단어의 무거움을 그녀는 아주 덤덤히 등에 지고 견디며 살아왔다. 그녀는 어쩌면 극 중에서 가장 처연한 존재다.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동생과 몸을 섞은 남편의 영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 했고, 남편과 이별한 뒤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생과 어린 아들을 홀로 돌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에게 힘듦을 토로하거나 기댈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아픔을 내적으로 곱씹어 삼키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나무 불꽃>의 전개는 매우 혼란스럽다. 현재와 기억, 꿈, 생각, 상상이 뒤엉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인물의 대사는 따옴표 처리가 되어 있지 않다. 인물의 말과 의식과 외부환경의 묘사는, 그걸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는 듯 뒤섞여 있다. 마치 스스로의 의식을 위태롭게 붙잡고 있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듯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 "~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가정을 한다. 과거를 되뇐다고 해도, 과거를 고쳐 쓴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영혜를 구급차에 싣고 숲 속을 달리는 그 장면에서 영혜에게 "어쩌면 꿈인지 몰라"라고 말하는 그녀는 결국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 이 것이 꿈이라 스스로에게 세뇌하는 듯하다.


인혜는 어쩌면 소설 속 그 누구보다 삶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 모른다.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아들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윤리의식이 가느다란 실처럼,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를 삶의 방향으로 당기고 있다. 사실 그녀는 미쳐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성의 끈을 놓고, 자유로운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고 싶은지 모른다. 그래서 현실의 시간은 그녀에게 매우 가혹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무엇 하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현실 속에,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시간은 야속하기만 하다. 그 매서운 시간의 바람을 그녀는 온몸으로 견디고 서 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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