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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양 Jun 16. 2023

[9화] 직장, 반복되는 트라우마

이해받지 못한 마음

트라우마는 해결될 때까지 반복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제 삶의 목적은 혼자 모든 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가진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집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공이 필요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성취에 집착으로 이어졌습니다. 제 꿈이 실현되어 저의 굴욕감을 한방에 씻고 모두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기길 바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공기관에 취직을 했습니다. 너무 일찍 찾아온 행운이라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 기분이 딱 하루에서 끝났다는 게 문제였죠.  


이튿날, 부서장님께서 옆 사무실 비서자리가 공석 상태이니 저에게 잠시만 비서 업무를 해줄 수 없겠냐며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입사원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을까요. 직원으로서 명령받은 일은 해야죠. 알겠다고 말씀드린 뒤, 제가 당분간 모실 분의 얼굴을 뵈러 집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모실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는 순간 얼어버렸습니다. 제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할머니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기셨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심술과 욕심과 스트레스가 가득해 보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몸에서는 찌든 독한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책상을 보니 서류가 지저분하게 쌓여있더군요.

    

셋째 날, 아침에 비서실에 출근하여 앉아있는데 갑자기 집무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서류 가져와.” 저를 부르는 호칭은 이름이 아닌 “야!”였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저는 모욕적인 대우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적 막무가내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반 포기상태로 대응을 했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던 것 같습니다. 그 상사분은 매일 직원들을 불러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능력 없는 직원을 붙잡고 사표를 내지 않으면 자신이 사표를 내겠다며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매일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식당에 가면 식당직원들에게 "야! 이거 줘, 저거 줘"라고 반말을 하셨죠. 민망함은 옆에 있는 사람의 몫이더군요. 밥을 먹으면서 일방적인 설교만 쏟아냈기에 함께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인 설교는 대부분이 나르시시즘적인 자랑이었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으로 혼자 대한민국 인구의 10,000명 이상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허황되고 자기중심적인 말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다가 밥을 먹는 것뿐이었죠. 그 상사분이 몰고 다니는 중압감과 스트레스,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나르시시즘, 강압적인 태도를 매일 홀로 상대해야 했고, 화가 날 때마다 문을 쾅 닫으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 모든 공포와 외로움을 혼자 견뎌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상사분이 어떤 분인지, 제가 입사하기 전에 왜 비서자리가 비어있었는지 주변 직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제가 입사하기 전에 제 자리에서 3달 정도 근무한 후 사표를 쓰고 나간 직원이 3명이나 되고, 계속 공석으로 둘 수 없으니 쉽게 사표를 내지 못하는 저를 입사하자마자 앉힌 것 같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담당 팀장님께 도움을 요청해도 실질적 해결책이 아닌 심정적 위로뿐이었습니다. 내심 제가 홀로 그 자리를 잘 버텨주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믿어서 위로해 주는 게 아니라 일을 미룰 사람이 없어서 위로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직원들에게 험담의 대상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런 저를 보면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찮은 사람인건지, 세상사람들이 원래 다 이모양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방관하는 사람만 있었기에 저 혼자 모든 걸 견뎌야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아이유의 someday를 들으면서 매일 하루를 버티고 또 하루를 버티다가 퇴근해서 잠이 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눈물이 멈추길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이 눈물을 말려주길...
- 아이유, someday 中 -



버겁고 외로운 기분. 혼자 이 악물고 애를 써야만 하루하루를 살 수 있다는 현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해도 참으라는 말 뿐이었으니까요. 세상에 대한 분노, 불신이 쌓여갔습니다. 집에 돌아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회사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제 선택권은 없었고 돌아갈 안식처도 없었습니다. 직장생활이 어린 시절 집에서 겪었던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의 상처는 매 순간 반복되고 있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제가 실수를 할 때마다 아빠가 고함을 질렀던 것,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제 탓을 하며 몰아세우는 것, 언니가 언제나 이기적으로 굴며 내 험담을 한 것. 그리고 아무 대응을 하지 못한 나. 본능적이고 폭력적인 감정을 발산하는 가족들에 대한 혐오는 고스란히 직장에 있는 사람들로 옮겨왔습니다. 그래서 피해자인 내가 착하게 살고 희생하며 버텨서 가족들을 이겨야겠다는 비현실적 관념과 무리한 노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피해를 받은 나는 언제나 저는 착하고 독기 어린 태도로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고 믿었기에 더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착하게 열심히 살면 언젠가 누가 알아준다는 동화 속 이야기를 믿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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