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지 못한 마음
마음이 가난한 젊은 직장인이 아무것도 몰라서
더 큰 절망 속으로 빠지는 7단계
첫 번째 슬픔
저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삶의 고민을 해결할만한 기술을 익히지 못하고 마음의 짐과 병만 잔뜩 안고 있는 상태에서 급히 취업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취직을 한다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사회에 일방적으로 방출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고, 내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이 종잡을 수 없기에 두려웠습니다. 무지하고 잔뜩 겁먹은 제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하죠. 이렇게 겁먹고 있는 저를 누군가는 눈치채고 저를 매섭게 공격합니다. 하루하루는 인간관계 시험의 연속이죠. 그 어떤 곳에도 정답은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나름대로 해결을 해보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실수를 하면 아빠에게 미친 듯이 혼났기에 스스로의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습관이 자리 잡혀 있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에 휩싸여 오히려 편협하고 바보 같은 행동만 반복합니다. 제 마음속에서 자기 비하, 억울함, 분노, 슬픔만 도돌이표처럼 떠돌 뿐입니다.
두 번째 슬픔
어른들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감정을 나누며 소통을 해본 경험이 부족하기에 사람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예측이 되지 않기에, 쉽게 겁먹고 미워하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피해자 마인드가 있는 상태에 가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단지 ‘내가 못나서’라는 결론만 냈기 때문에 제가 못났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최대한 피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관계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게 되죠. 업무 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노력은 쓸모없다고 치부해 버리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배운 표현방식은 비난과 멸시가 대부분이었기에 제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데만 에너지를 쏟을 뿐입니다. 남에게 상처를 줘서 미움받기 싫으니까요.
세 번째 슬픔
저의 내면에는 나를 괴롭혔던 비상식적인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주겠다는 오기와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시에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환상을 만들어 도피하기도 합니다. 이 가여운 현실을 누군가가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 추상적인 아름다움이나 순교자적인 헌신에 대한 갈망, 단기적 목표에 대한 강박적 집착, 나는 착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바뀌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자기 합리화가 그것입니다. 스스로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무작정 따라 하니 행동은 부자연스럽겠죠. 비현실적인 관념이 머릿속을 지배하기에 현실적인 문제해결은 뒷전입니다. 내 과거를 탓하고, 환상적인 미래를 막연하게 희망할 뿐이죠. 하루하루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음악, 매운 음식 등 중독에 빠져 사는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인 생활패턴을 반복합니다. 이 패턴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해요.
네 번째 슬픔
이때부터 상황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학대가 습관이 된 사람 주변에는 학대자적인 면모가 강한 사람들이 주로 몰립니다. 정상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동등하고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제가 밀어내게 되더군요. 저는 일방적으로 마음을 받기만을 원하고 부정적 사고에 지배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즐거운 관계를 갖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다고 생각을 했고요.
제 마음속에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스쳐 보내야겠다는 생각보다 이겨서 굴복시키고 참교육을 시키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훨씬 강했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요즘말로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더군요. 제가 만난 나르시시스트들과의 관계는 한결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저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채워주고, 그 대가로 저를 부려먹고 지배하더군요. 저는 내심 나르시시스트들의 지배를 당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을 꺾고 싶어서 갖은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기기는커녕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모든걸 뺏긴 채 끝이 나더군요.
다섯 번째 슬픔
저는 겉으로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상하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지배를 하거나 지배를 당하는 편이 편했고, 상하관계 속에서만 사랑과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환상적이고 자극적인 말로 저를 휘두르는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되더군요. 제 안의 결핍을 그 사람이 한 번에 해결해 줄 것만 같은 환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착취적인 사람이 주변에 즐비하게 되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할 기회는 점점 멀어집니다.
여섯 번째 슬픔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해소하지 못한 채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한 사람의 말을 과도하게 믿거나 전부를 부정해 버리는 이분법적 사고(all or none)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과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단순하고 편협하게 모든 상황을 해석해 버리죠. 예를 들어, 나에게 잘해줬느냐 못해줬느냐에 따라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고, 학력으로 모든 사람의 인격을 판단해버리는 식입니다. 이 때문에 누군가에게 쉽게 기댔다가 데인적도 여러 번이고, 많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저의 시간은 또 다른 고난으로 점철되어 갑니다. 타인이 나의 기대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은 단순한 소망이 아닌 집착으로 변해가 주변 사람들을 은근히 괴롭히기도 합니다.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더욱 흔들립니다. 그럴수록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두렵고 피해의식과 내면의 저항이 심해지면서 무기력과 현실도피를 반복하게 됩니다.
일곱 번째 슬픔
일방적인 소통방식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나를 공격하는 가해자, 나는 아무 대처를 할 수 없는 피해자’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 대처를 하지 않고 상황을 방치하죠. 이것은 마치 어렸을 적 아빠가 저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을 때 공포의 감정에 압도된 나머지 아무 대응을 할 수 없었던 어렸을 때 기억으로 단번에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저에게 협조요청을 하면 저를 일부러 괴롭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상식적인 요구에 거센 저항감이 올라오죠. 이것은 어렸을 적 엄마가 저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맞춰달라고 비난하면서 괴롭혔던 기억으로 단번에 되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공격당할까 봐 두렵고, 날이 선 이기심과 욕망들 사이에서 무시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주변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 순간 목적을 상실한 채 이기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저돌적이게 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잠을 자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이것은 어렸을 적 언니에게 속수무책으로 무시당하고 오해받아서 홀로 버려지는 외로운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