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by 쓱쓱

너무 가득 차면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게 되고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그만 멈추게 된다


섣불리 무언가를 먼저 시작하는 게

나머지 다른 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혹여 다른 것들이 홀대당하는 느낌이 들까 봐

그만 멈추게 된다


터질 듯 팽팽해져 있어

이리보고 저리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심해지면

그만 멈추게 된다


결국 가만히 내 안의 것들을 끌어안고

껌뻑껌뻑 눈만 굴리다가

왠지 더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멈추게 된다


비록 밖으로 내보내진 못했지만

더 깊은 여운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멈춰진 그 모습 그대로

뒤돌아 서게 된다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것 하나 잃지 않았다는 것이

그 어떤 위로보다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 같아

희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어릴 적 나는 침묵이 불편했다.


이제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불안 때문이었다.






잠시도 오디오가 비지 않던 집에서 자란 나는

가는 말이 있으면 실제 원하지 않아도 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우리 집에는 말과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는 요술 맷돌이 있는 듯했다.


하나의 말이 다른 말을 불러왔고

하나의 이야기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고 왔다.

그래서 집은 늘 시끌벅적했고 그만큼 웃을 일도 많았으나, 다툼도 잦았다.


말은 정서와 함께 가기 때문에

말이 빠르고 높아질수록 감정이 고조되기 쉬웠고

가끔은 멈추는 법을 잊어버려 극한으로 치닫기도 했다.


특히나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관철시키거나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집중된 말들은

십중팔구 갈등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갈등을 멈추기 위해 침묵하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거나 억울함이 생겼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표현을 해야 했고,

동시에 상대방 또한 표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도통 알 수 없으니까.


그래인지 나는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불편했고

특히 갈등 상황에서 침묵하는 사람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말을 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를 알 수 있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침묵을 견디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내 안의 불안 때문이었다.


나는 불편한 상황과 그 사이에서 뿜어 나오는 긴장을 견디는 힘이 부족했다.

불편한 상황과 갈등을 빠르게 해결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매번 앞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관계에 대한 나의 불안에 기반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불안은 유기와 버려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의식적으로 나는 부모님과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믿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유아기와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소년기 부모님의 갈등 속에서

어쩌면 유기에 대한 불안을 지속적으로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확신과 불확신 사이에서 나의 불안은 삐쭉거리며 조금씩 몸을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침묵을 불편해하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고 해서

그 불편감이 바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침묵에 책임져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갑자기 말이 뚝 끊기고 침묵이 흐르면 어색했다.


그렇게 어색함이 길어지면 이내 뭔가가 불편해졌고

자동으로 말 버튼이 눌러졌다.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완벽히 어긋난 타이밍 속에서 나는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그럼에서도 나는,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온 맘을 다해 표현하고 싶었고

조금의 오해도 생기지 않게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표현해 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표현해 버리면 규정되어 버릴 내 마음이 아까웠다.

어떤 말로 설명해도 결코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았다.

흡족하게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침묵이 주는 의미를 고통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나 중요해 섣불리 고를 수 없는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마음의 반영일 수도 있으며

모두를 지키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침묵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더 잘 알아차리게 되었고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종국엔 모두의 안녕을 조금이라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을

이제는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침묵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아주 조금 더 깊게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의 것이든

침묵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와 그 과정 자체가

나를 조금씩 성숙이라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것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침묵을 마주하는 것이 그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침묵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다른 내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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