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 영문과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한 미국문학 전공 교수님은
날카로운 눈매에 적당한 두께의 안경을 쓴 과학자 같은 외모로
너새니얼 호손과 폴 오스터의 소설을 가르치셨고
여대의 특성상 음기로 가득 찬 교실에서 그야말로 햇살같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나타냈다.
특히 쌀쌀한 가을이 되면 깔끔하고 댄디한 셔츠 위로
손이 마법에 이끌리듯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도톰한 카디건을 걸치고
한 손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다란 머그컵을
다른 한 손엔 태어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어소설을 들고
미끄러지듯 교실로 들어와 털실로 짠 카디건과 머그컵만큼이나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간 내 주변엔 문학을 읽고 공부하는 남자가 단 한 명도(것도 참 희한하다) 없었으므로
교수님의 존재는 외계 생명체처럼 생소했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특히 그가 애정하던 폴 오스터와 밥 딜런은 높은 예술의 경지가 있음을 알게 해 주었고
그의 해석 속에서 빛나던 주인공들과 스토리, 무엇보다 삶의 의미는
호모 나렌스의 DNA를 무참히 자극했다.
그리하여,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에게
수세기 동안 살아남은 좋은 소설을 읽고 그 속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끊임없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나름의 답을 고민하는 치열한 과정이었고
인류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수많은 장면들을 직간접적으로 흡수하는 매혹적인 여행이었다.
문학수사적 표현과 묘사에 사용되는 낯선 영어단어들을 째려보면서
세상에 피투 된 인간으로서 종국에 남은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심플했다.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여야 하는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과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뭐, 말장난 같지만
그 시절 나에겐 세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명제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설명해 놓은 소설을 탐닉했다.
소설 속 인물이 마주하는 세상에서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며
경우의 수들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열심히 그것도 매우 흥분된 상태로 흡수했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공부를 합법적으로(학생은 공부를 하는 게 일이니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찼고
비록 대학시절 내내 치열한 경쟁체제 아래 장학금을 사수하기 위한 긴박한 긴장감을 느껴야 했지만,
그럼에도 문학만 생각해도 되는 그 시간이 그저 행복했다.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보자면,
문학과 소설을 제대로 찐하게 만난 시간은 고작 4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 강력해서
나의 삶은 그 시간을 기준으로 다양하고 새롭게 형성되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그토록 강력한 에너지와 힘은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나는 그것이 문학이, 소설과 스토리가 지닌 에너지이자,
수세기를 거쳐 지금 우리에게 도달하는
인간의 응집된 욕망의 엔진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인간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지금의 우리에게, 현재의 나에게
그저 다 괜찮다는 매우 신뢰할만한 격려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삶은 대부분 이분법이 아니라는 것,
대립의 개념은 항상 뒤섞이며 혼재되어 있다는 것,
그럼에도 삶은 끝을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전진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우회로와 지연이
어쩌면 우리를 올바른 끝으로 밀고 가는 엄청난 에너지의 동력이 되는 것을
문학과 소설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