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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유효기간

퇴사를 고민하는 어느 날의 기록

by 연목

최근 두 개의 강의 일정이 잡혔다.


매년 3월이면 연락을 주던 면접관 제안이 이번에는 없어서 조금 충격이었지만

요즘은 그냥 조용히 회사 일을 하면서..(사실 엄청 바쁘다) 쉬고 있어서 별 생각이 없었다.

개인 IT 커리어 컨설팅만 조금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이번엔 내가 먼저 나선 것도 아니고, 내가 널리 알려져서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변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거 너 아니야?"하면서 자리에 나를 소개시켜주면서 강연기회가 2개 잡히게 되었다. ‘인적 네트워크’란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다들 너무 고마웠다.


사실 강의를 하고 싶었나보다.

강의비는 사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강의를 하면 거의 땀에 쩔어서 끝나기 때문에... 영혼까지 토해내는 느낌이다.

2시간만 해도 몸이 늘어진다. 끝나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리게 된다.


사실, 강의나 면접은 작년부터 거의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짓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직업을 좋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만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일을 해보려 한다.


컨설팅을 하면서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하다.

교사, 교수, 은행원, 의사, 미국에서 고연봉을 받고 있는 데이터분석가, 사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내 직업을 꿈꾸며 나를 찾아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종종 유튜브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

'세상엔 돈을 버는 방법이 이렇게나 다양하구나. 왜 나는 대학생 때 개발자밖에 생각하지 않았을까. '

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에 몰두하다 실패하는 일이 많았고, 그때는 그것도 괜찮았는데, 돌이켜보면 운이 좋지 않았던 것도 같다. 코로나로 무산된 실리콘밸리 인턴십과 교환학생 기회도 그렇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부터 다시 만들면 된다.


먹고 사는 일이 이상하게 늘 버겁다.

대단히 가난했던 것도, 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늘 힘들다.


요즘엔 퇴사하기 좋은 타이밍이 자잘하게 있었지만, 정작 나에게 검토할 시간은 없었다.

지옥의 3년 차 대리급. 아직 승진도 없고, 월급도 그대로지만, 일은 훨씬 많아졌다.


요즘 들어오는 기회들은 대부분 시간제한이 있는 제안들이라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데,

나는 결정장애가 있어서 며칠 안에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직은 어렵다.


링크드인을 보면,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멋진 사람들만 보이고,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다들 열심히 살아서 오히려 숨이 막힌다. 나 자신이 뭘 해냈는지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은, 그냥 대충 살고 싶다.


사람은 시절마다 빠르게 변한다. 그게 더 나다워지는 과정이고, 성장이라는 걸 알기에 좋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시간이 너무 빨라서, 감정이 사라지는 속도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라 무섭다.

스위스에서 느꼈던 위기감도 어느새 흐릿해졌지만, 최근 드로우앤드류 채널을 보며 다시 조금씩 위기감을 되찾고 있다. 이렇게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재미있는 건, 예전에는 이연 채널은 좋아했는데 드로우앤드류는 이상하게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채널의 어떤 콘텐츠가 묘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똑같은 말이라도, 듣는 시기와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울림을 주는 게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자아는 여전히 강하고, 결국 모든 건 ‘타이밍’이라는 운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해로운 인연은 끊어낼 용기를, 나에게 좋은 인연은 운처럼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알겠다.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는 서서히 끝나가는 느낌이다. 나에게 코드란 창작의 도구로서 적합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글이라는 도구가 더 나에게 맞는 듯하다.


매일 똑같이 사는 건 편하지만, 그렇게 살면서 10년 뒤는 달라지기를 바라는 건 망상이다.

매번 잊고 지내지만, 결국은 스스로 되새겨야 할 진리.


아마 올해 안에 퇴사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그 길이 조금이라도 순탄하길, 간절히 바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퇴사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폐인처럼 살까 봐’ 고민 중이다.

하지만 가끔은 저질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직 뭘 할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일은 마음만 먹으면 회사를 다니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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