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Mar 14. 2021

21. 아버지를 느끼다.

8월 24일 


6개월 만의 면회를 엄마가 하고 온 후에 면회는 다시 중단되었다.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상황이다. 

노년의 환자들이 6개월이 넘도록 가족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뭔가 생생한 기억을 해낸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지속적인 자극이 있어야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기억이라도 간신히 유지될 터인데 간병인과 간호사와 담당 주치의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접촉이 없으니 기억을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런지도...


간호사로부터 가끔 안부를 전하는 전화가 있을 뿐이었다. 

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에 어렴풋이 낮잠에 들었는데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 


키가 큰 아버지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의 강당 같은 공간에 서 계셨었다. 둘째네가 한창 사업이 잘 될 때 사드렸던 값비싼 카키색  점퍼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안에는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모습이었다. 나를 알아보고는 앉으라고 해서 마룻바닥 같은 곳에 앉았더니 두 사람의 부축을 받기는 했지만, 한쪽 다리를 세우고 벽에 기대어 앉아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는 이제 화장하러 갈 거다. 마지막으로 너네한테 할 말도 있고 인사하러 왔다."

" 무슨 말씀 이세요? "

" 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데리러 왔잖니... 그동안 너희들과 엄마가 고생 많이 했다. 나는 잘 갈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미처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일어서시더니 두 사람과 함께 휘적휘적 건물 밖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그 뒤를 뛰어가며 아버지를 부르다가 벌떡 일어나며 잠이 깼다. 

꿈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방으로 와서 물을 한잔 마시고 잠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꿈 이야기를 전했다 


"너네 아버지가 가실 때가 되었나 보다. 옛날부터 죽으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어."

"그러셨어? 시골 뒷산도 있는데 거기에 산소를 하는 건 아니고?"

"시골로 가는 거 싫다고 했어. 마누라도 못 알아보니 이제 갈 때가 되긴 했나 보다."


예상보다 엄마와의 통화는 담담했다.


오래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금니가 빠지는 꿈을 꿨는데 엄마는 할머니 돌아가시는 꿈이라고 했다. 그 꿈 이후에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뒤로 나는 유난히 꿈에 생생할 때는 뭔가 주변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의 반영처럼 해석하곤 했다. 


코로나 상황에서 장례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봐야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가족장으로 해야 하는 건지 뭔가 결정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인듯한데 병원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기에 동생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꿈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여름이 지나가고 9월이 와도 아버지는 여전히 그대로 병원에 누워계셨다. 간호사로부터 말씀은 못하시지만, 호흡도 좋고 욕창도 좋아지고 있다는 연락이 왔었다. 별다른 증세가 없으니 가족분들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여름 낮 꿈은  정말로 개꿈인가 보다 하며 생생했던 꿈을 잊어버리려 했다. 

그리고 가을을 지나며 정말로 서서히 잊혀갔다.



10월 추석 이후


가끔씩 병원에서 전하는 소식은 늘 비슷한 내용이었다.

"말씀은 안 하시고, 식이는 잘 되고 있고요. 팔과 손은 조금씩 굳어가고 있지만, 혈압과 체온은 정상입니다. 면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족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잘 돌봐드리고 있습니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여름의 끝자락에서 아버지를 꿈에서 봤다는 이야기를 추석 때 친정 식구들 모임에서 전했다. 낮 꿈은 개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모두들 가실 때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가족 모임에서 다시 한번 아버지 영정 사진을 뭘로 할 것인지 정하고, 만약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은 어디로 할 것이고 절차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건강하실 때 영정 사진을 미리 찍어두지 못했는데 식구들 모두 밝은 모습의 사진으로 하자고 했다. 3권이나 되는 가족앨범에서 아버지 사진을 찾아보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거의 없고, 웃는 모습의 사진에서도 뭔가 표정이 어색한 이 대부분이었다.  웃을 때 한쪽 입이 기울어진 모습을 찾아내며 내게도 비슷한 사진이 많다는 얘기를 하며 이런 거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놀라운 유전의 영향이라는 말도 하면서 사진 속 아버지를 여러모로 참 많이도 살펴봤다. 여행 사진에서 3장을 고르면서 10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가족 여행 얘기를 하며 모두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그때 여행을 해서 참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누었다.


가족 모임 이후 나는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났다.  마치 옆에 다가와 있는 아버지 영혼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주방에서 물을 마시면 아버지가  옆에서 말을 거는 듯할 때도 있었고,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 건너편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일 때도 있었다. 어떨 때는 침대 끝에 가만히 앉아있는 듯한 느낌일 때도 있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입증할 수도 없는  어떤 특별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무섭다거나, 오싹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밝고, 약간은 환해지는 느낌이라 오히려 이 느낌이 정말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그다지 친밀한 부녀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런 느낌들은 뭘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아마도 아버지 죽음 이후에 가이드를 하고자 했던 것 때문인듯 했다.


죽음 이후의 과정을 다루는 다양한 종교적인 행사들도 있지만, 종교적인 것과 관계없이 외국 단체에서 주관하는 죽음에 관한 안내자 과정 워크숍을 오래전에 받았었다.

그저 막연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었는데 아버지가 오랜 시간 병상에 계신 상황이다 보니, 아버지에 관한 가이드를 해야겠다는 선택을 했었다.


가족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좋은 느낌보다는 뭔가 불편하고 안타깝고 왜 그렇게 사셨을까 싶은 원망 어린 시선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내게 부양의 대상이었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었으며, 가정에 대해 경제적 책임감이 없는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감정이나 판단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늦둥이 막내를 포함하여 나머지 딸들에게도 공통적인 감정이었다고 본다.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래도록 그런 감정을 안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이번 생에 가족으로 만나 이러저러한 스토리를 엮으며 살아왔지만, 죽음 이후에는 그런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저 일정한 시기를 함께 겪어갔던 존재로 바라보고 싶었다.


막연한듯한 나의 바람이 어쩌면 아버지에게도 전해졌는지 아니면 나의 환상인지는 몰라도 추석 이후에 여러 차례 아버지를 느끼곤 했다. 이별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가 보다 했다.


이전 20화 20. 딱 한 번의 면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