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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22. 2021

24. 엄마의 편지

1월 21일 ~ 3월 10일 (장례에서 탈상까지)


요양병원에서 사망선고 이후 병원 앰뷸런스로 아버지 시신을 모셔가는 것을 지켜본 후  가족들은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빈소와 제단 형태, 식사 메뉴와 도우미 숫자, 입관 물품,  상복 수량 등을 정하고 결제를 하면 되었다. 점심때가 지나야 빈소 자리가 난다 해서 식구들은 집으로 갔다가 필요한 물건을 챙긴 후에 다시 모였다. 관리실에서 상복을 받은 후 빈소에 모인 사람은 엄마와 손자 손녀 포함하여 모두 12명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영안실 최대 상주 인원을 30명 이내로 지켜달라는 장례식장 측의 요구가 있었다. 가족장으로 지낸다는 부고를 띄우고 각자 일터에도 연락을 하고 꼬박 3일간 가족들은 함께 지냈다. 아주 가까운 친척들이 다녀가고, 직장 동료와 친구들은 대표로 한두 명씩만 다녀가서 한 번에 모인 최대 인원이 정말로 30명을 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올해 95세  아버지의 큰 누님이 같은 날에 3시간 먼저 돌아가셨다. 한 집안에 두 초상이 일어난 지라 친척들도 분산되었다. 


입관은 사망선고 후 24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과 사망자의 주소지에 따라 승화원이 결정된다는 말을 장례식장 담당자에게 들었다. 수목장 관계자의 브리핑을 듣고 나서 가족들은 차량 접근성이 좋은 용인 쪽으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딱히 뭔가 결정할 사안은 더 이상 없었다. 발인할 때 누가 운구할 것이냐로 약간의 말들이 있었지만, 여자들이 운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는 장례지도사의 말에 아들애 친구들을 부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장례절차에는 뭔가 모르게 유교적인 관념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첫날 빈소 차리고 둘째 날 입관하고 셋째 날 아침에 발인을 하고 승화원으로 갔다. 가족 12명에 3분의 친척이 합류해서 모두 15명이 승화원을 거쳐 수목장지까지 동행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유골함을 모시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와서 상복 반납하고 점심 먹고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이 그렇게 어렵다는 느낌은 없었다. 전화와 결제용 카드만 있으면 물 흐르듯 흘러갔다. 뭔가 장례문화도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빈소를 차리자마자 처음으로 조문을 오신 친척 남자분께서 너무나 서럽게 우는 바람에 가족들도 함께 울었다. 아버지 육촌이라고 하셨는데 어릴 적에 한동네에서 함께 자랐다고 하셨다.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죽음을 대하는 각자의 슬픔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가끔씩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도 흘렀지만, 정작 나 자신은 대성통곡할 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잔잔한 슬픔이 가슴에서 일렁거리긴 했다. 


입관할 때  가지런히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죽음을 실감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한 마디씩 하라고 했을 때 식구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다행인 것은 정말로 평안한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이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할 때 셋째가 울기도 했지만, 자그마한 향나무 아래 유골함을 묻을 때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장지를 돌아 나오며 이제 정말로 물리적으로도 아버지와는 이별이구나 싶었다. 


장례식 후 엄마 집으로 가져간 아버지 위패와 영정사진은 삼우제 하는 날 우리 집으로 왔다. 10시에 모두 모여 제를 올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장지를 다녀오는 것으로 삼우제를 치렀다. 


 삼우제 다음날 아버지 위패를 모신 작은 방 창 밖 난간에 황조롱이 비슷한 새가 오전 오후 두 차례나 앉았다 갔다. 대로변 아파트 14층 창틀에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가 한동안 앉았다 갔다는 내용을 가족 톡방에 올리니 막내가 " 아빠는 새가 되어 다녀갔나 보네. 우리 집에는 안 오나? " 했다. 


정말 아버지는 새가 되셨을까?


위패와 영정은 탈상하는 날인  49재 때까지 우리 집에 모셨다. 간간히 향도 피우고 아버지를 느껴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삼우제를 치르고 일주일 후에 셋째가 아버지 사망신고와 셀프 상속을 신청하고 금융자산 정보조회를 진행했다. 집은 엄마가 상속받는 것으로 하고 다른 자산은 딱히 없었기에 세금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 진행해야 하는 법적 절차는, 사망신고 외에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할 수 있다.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는 가족들이 해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으니 다행이구나 싶었다. 


49재는 가족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상복을 벗고 장지에 다녀오는 것으로 했다. 예전에는 탈상하면서 고인의 유품도 태우는데 요즘에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상복은 모두 모아 일반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기로 했다. 오랜 병상 끝이라 이미 많은 물건들을 정리해서 아버지 유품은 엄마네 집에 있는 양복 한 벌, 한복 한벌, 구두 한 켤레와 내가 가져온 책 몇 권만 있을 뿐이었다. 엄마 집에 있는 유품은 엄마가 알아서 때가 되면 정리하실 것이다. 내가 가져온 아버지의 물건은 정리하기로 했다. 낡아서 테이프로 붙인 책 3권과 오래전 신문스크랩도 함께 정리하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수목장지에 가서 인사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엄마가 아버지한테 쓴 편지가 있다는 말을 했다. 


"오호... 역시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여전하네! 그런 거 있으면 여기서 읽어야지... 우리 좀 떨어져 있을 테니 읽어보세요."


올해 84세인 엄마는 핸드폰에 적어온 편지를 읽으셨다. 


 영면하신 당신에게 

 49재에 글을 올립니다


서러움 반

외로움 반

왼편 마비에

보행기 의지하며

한걸음 또 한걸음

넘어지기를 수 십 차례  

이웃분들의 도움으로  

꼼작 못 하고 있는 걸 일으켜  주시면

물 한 모금 마시며 

벽을 치고 

괴로움을 달래던

안타까운 마음 잊지 못합니다.


고통 없는 저 세상은 어떠한가요?

당신의 빈자리를

딸들과 함께

지켜 가겠습니다

극락왕생 하시고

명복을 비옵니다.


          당신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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