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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Feb 15. 2024

차별하는 마음

잡문집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 보태어질 작은 증명이 될 수 있을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아. 어느 잘못은 백번이고 뉘우칠 듯이 굴면서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기억에게는 매몰차잖아. 그날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던 일이었다고 말할만한 때가 있고, 시시각각 선명한 입장을 세우고 살 수도 없는 거지만. 어느 정도의 비겁함과 나약함은 누구나 갖고 산다지만. 이제는 나와 무관한 날들 앞에서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게. 전부 다시 없을 마음과 이야기인데 이렇게 차별을 하고 말아.


언제나 다정을 잃지 않던 사람에게서 어느 날 울면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별것도 아닌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얼른 통화가 끝나기를 바랐어. 곧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죄책감이라고 말하고 보니 내 안에서 미안함과 죄책감은 꽤 다른 표정을 짓고 있구나. 미안함에 서 상처받은 상대의 얼굴을 떠올린다면, 죄책감은 고개 숙인 내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이건 마음보다도 명백함의 영역에 가깝구나. 판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죄책감이라고 쓴 내가 좀 징그러워.

밝은 목소리로 금방 전화를 받은 그 애는 이제 괜찮다며 웃었어.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하지만 그날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느 분명한 선택을 한 거였지. 때로 마음은 그 자체로 결정이나 답 같은 게 되어서는 확고하게 쏘아져 철저하게 박힌다. 그러고 나면 어떤 결과든 책임을 져야만 해. 이때는 그저 운이 좋았던 거고. 그런데 좋았던 게 정말 맞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아직 모를 뿐인지도 모르겠어.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는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짝사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약속을 잡았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 이야기를 굳이 들으러 가겠다고. 한 친구는 오랜 시간 끝에 모두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던데 정작 가장 큰 상처를 받았을 그에게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미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나.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공정하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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