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남은 시간

by 연월랑

그녀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건
어느 날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저녁부터였다.

편의점 앞 전등이 켜질 무렵이면
하루는 이미 제 몫을 다한 상태였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문을 밀었고,
늘 같은 캔커피를 집었다.
맛을 고르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의미가 없어졌다.

“이 시간에 자주 오시네요.”

계산대 앞에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확인한 사실을
말로 옮긴 것에 가까웠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손에 남은 먼지와 굳은살을
굳이 털어내지 않았다.
하루는 대개
그런 상태로 끝났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었다.
먼저 계산을 마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손님이었다.
수수한 옷차림,
눈에 띄지 않는 가방.
기억해 둘 만한 이유는 없는데
자꾸 시야에 남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종종 마주쳤다.
약속한 적은 없었고,
말은 늘 짧았다.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접는 타이밍이 겹쳤고,
비가 그친 날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 번은,
다시 마주쳤을 때였다.

편의점 문을 나서던 그녀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시선은 나를 보지 않았고,
표정도 없었다.
마치
사람 하나쯤은
그 시간대의 풍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날은
캔커피가 유난히 빨리 식었다.

가을이 오기 전쯤,
그녀가 말했다.

“병커피 중에
괜찮은 거 하나 있어요.”

나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도 결국
늘 마시던 걸 집었다.

한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적이 있었다.
편의점 문을 밀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계산대 옆을 보았지만,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시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 공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로가 아직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온다는 사실만
조용히 확인했다.

겨울이 오자
커피는 빨리 식었고,
편의점의 불빛은
늘 같은 밝기였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지 않았고,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편의점 문 앞에 섰다.

늘 집던 캔커피는
선반 한가운데에 있었다.
손이 그쪽으로 먼저 갔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던 병커피를
하나 집었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쪽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나는
손에 든 병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그녀 쪽으로
조금 내밀었다.

“이게요,
생각보다 맛이 좋아요.”

그녀는
병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아주 잠깐
웃었다.

“그럼
다음엔 그걸로 마셔볼게요.”

우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문 앞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도
그날의 병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시간은
원래의 속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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