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서 3장
비워진 들판은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연기조차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재는 흩어졌고,
흙은 다시 제 얼굴을 드러냈다.
들판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누군가의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현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현무는 말을 세웠다.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니던 흔적은
짐승의 발자국에 덮였고,
어제까지 울음이 남아 있던 자리는
아무 소리도 머물지 않았다.
부서진 수레 하나가
길가에 남아 있었다.
바퀴 하나가 빠져 있었고,
수레 위에는
이불과 그릇이 뒤엉켜 있었다.
급히 챙기려다
끝내 두고 간 흔적이었다.
그 옆에
아이의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작았고,
먼지가 눌어붙어 있었다.
현무는
그 신발을 집지 않았다.
집는 순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보다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신무는 성으로 들어왔다.
성문은 아직 닫혀 있었고,
망루 위에는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망루에서 내려다본 들판은
지도와 달랐다.
불길은 점처럼 번졌고,
연기는 바람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사람의 움직임은
먼저 멈추고,
그다음에 사라졌다.
그때,
아래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북원의 기병 일부가
성 아래 민가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곡식을 끌어냈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확인하듯 찔렀다.
군량을 다루는 손놀림은
익숙했고,
머뭇거림은 없었다.
찔린 뒤에도
몸이 바로 쓰러지지 않는 순간이
짧게 남아 있었다.
주작의 손이
난간 위에서 굳었다.
활은 등에 메어 둔 채였다.
쏘지 않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아직 쏠 수 없다는 망설임이었다.
주작은
성 밖을 보지 않으려 했다.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나가야 합니다.”
“저건 전투가 아닙니다.
군량을 핑계로 한 급습입니다.
지금 막지 않으면
이 전쟁은
백성을 먼저 삼킵니다.”
주작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병은 흩어져 있습니다.
지금이면
막을 수 있습니다.”
청룡은
망루 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접힌 지도가 들려 있었다.
지도 위에는
마을보다
보급로가 먼저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청룡의 말은
짧고,
단정했다.
“지금 움직이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현무가 물었다.
“그럼
저 백성은
어찌합니까.”
청룡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
차라리 낫다.”
그 말은
명령도,
거부도 아니었다.
다만
국가의 논리였다.
그 순간,
현무는
자신이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신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함께 알았다.
현무는
청룡을 더 보지 않았다.
그는 돌아섰고,
계단을 내려갔다.
성문 아래에서
병사 몇이 그를 바라보았다.
“따를 사람만 따라라.”
설득은 없었다.
명분도 없었다.
몇 명이 움직였다.
많지 않았으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현무가 말을 올려 탔을 때,
성문이 열렸다.
쇠가 갈리는 소리가
성 안에 길게 울렸다.
그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 선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처럼
천천히 사라졌다.
그 순간,
현무는
이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잠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만
자신의 선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신을 살리고 있는지,
파괴하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날,
전쟁은
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걸음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사람의 선택만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