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들판의 방식

정의의 서 2장

by 연월랑

들판은
사람보다 먼저 비워지고 있었다.

불은 이미 지나갔으나
그 흔적은 오래 남지 않았다.
탄 나무의 냄새보다
젖은 흙의 냄새가 먼저 올라왔고,
바람은 재보다
말 없는 공기를 더 멀리 옮겼다.

사신무가 도착했을 때,
마을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살아 있는 방식이 사라져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솥은 식은 채로 남아 있었으며,
우물에는 아직 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았다.

우물 옆에는
끊어진 줄이 매달려 있었다.
잘린 것은 밧줄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길 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레를 끌 힘이 남지 않은 노인,
아이를 업은 채 멈춰 선 여자,
무엇을 챙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얼굴들.

그들은 도망치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주작은 말에서 내려
아이에게 물을 건넸다.

아이의 손은
그릇보다 먼저 떨고 있었다.

그 손은
이미 너무 가벼웠다.

주작은
그 떨림이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못할 일이
더 분명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무는 길가에 멈춰 서서
불에 그을린 창고를 바라보았다.

문은 부서져 있었지만
안쪽에는 곡식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져갈 수 없었던 흔적이었다.

곡식 위에는
타다 남은 볏짚이 흩어져 있었다.
불은 닿지 않았고,
사람은 이미 닿지 못한 자리였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곡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구원인지,
판결인지.

“지금 가야 합니다.”

현무가 말했다.

“저들이 더 내려오기 전에
앞을 막아야 합니다.”

주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병은 빠릅니다.
지금이 아니면
이 길은 전부 불길로 바뀝니다.”

그의 말은 분명했으나
활을 쥔 손에는
조금의 힘이 빠져 있었다.

겨눌 수는 있었지만,
아직 쏘지 못하는 손이었다.

청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 위에서
지도를 펼쳐 들고 있었다.

지도 위에는
마을보다 들판이 먼저 표시되어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지형이 먼저 기록된 지도였다.

“우리는 이기는 쪽에 서야 한다.”

청룡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감정은 실리지 않았다.

“백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라의 질서는 따로 있다.
하늘의 명은
눈앞의 혼란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주작의 시선이
잠시 땅에 머물렀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말보다 먼저
사람을 떠나고 있었다.

현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칼자루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 멈춤이
동의인지,
유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현무는
이 싸움이 아니라
이 싸움을 미루는 방식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히 느꼈다.

그날 밤,
태조의 전령이 도착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진형을 무너뜨리지 말 것.”

전령의 말은 이어졌다.

“시간을 끌면
우리가 유리하다.
저들은 유목이다.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말은 간단했지만
그 말이 지나간 자리에는
긴 침묵이 남았다.

계산이 끝났다는 침묵이었다.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이 명령은
새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미 계산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타는 들판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린 뒤에도
그의 손은
고삐를 놓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들판은 비워지기 시작했다.

곡식은 불태워졌고,
우물은 메워졌다.
창고는 부서졌으나
남겨진 것은 없었다.

청룡은 명령했다.

“남길 이유가 없다.
전쟁은 먹을 것으로도 치른다.”

그 말이 떨어지자
불길이 들판을 가로질렀다.

곡식은 타올랐고,
연기는 하늘을 향해 솟았다.

그날,
전쟁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것부터
죽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명령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었다.

주작은 불길이 오르는 들판을 보며
활을 쥔 손을 놓지 못했다.

불빛이 번질수록
그의 시선은
사람이 지나던 길을 따라 움직였다.

주작은 활을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현무는 말을 돌려
길 위에 남은 사람들을 다시 보았다.

그 시선에는
막아야 할 적과
버려진 숨이
같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수레를 버리지 않았다.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곡식보다 오래 살아온 시간이
실려 있었다.

그날,
북원의 기병은
예상보다 빠르게 멈춰 섰다.

말은 살아 있었으나
먹일 풀이 없었고,
사람은 많았으나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속도를 늦추었다.

들판은 비워졌고,
우물은 메워졌으며,
불만이 남아 있었다.

싸우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방식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현무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가
더 또렷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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