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지나가는 동안

by 연월랑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는
아직 다 녹지 못한 냉기가 얇게 남아 있었다.

아침 공기는 조금씩 가벼워졌고,
햇빛은 더 이상 눈 위에 머물지 않고
젖은 흙 쪽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른 가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끝에서
작은 빛 같은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꽃이라고 바로 부르지 못했다.
빛이 잠시 머무는 줄만 알았고,
다음에는
그 머무름이 조금 길어졌을 뿐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름 하나가 뒤늦게 따라왔다.

부르지 않아도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입술은 가만히 있었는데,
그 이름은 이미
봄 공기 어딘가에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나가던 바람이
어깨를 얇게 스치고 갔다.
그제야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이 있었다는 듯
손끝이 조금 늦게 식었다.

그 이름은, 부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떠나 있는 것 같았다.

손을 펴 보았지만
잡힌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빈 손은 쉽게 비워지지 않았다.

잠깐, 입술이 아주 조금 열렸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닫혔다.

봄은 그렇게 깊어졌다.
꽃은 가지마다 조금씩 늘어났고,
길 위에는 옅은 색들이
겹치듯 번져 갔다.

그 사이를 지날 때마다
한때 또렷했던 얼굴 하나가
꽃잎 뒤편처럼 아른거렸다.

가까워지는 것은
늘 선명해지는 일만은 아니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사라질 준비가 되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햇빛이 길어질수록
기억은 오히려 천천히 흐려졌다.
계절은
무언가를 데려오는 것보다
마음에 남은 것을
조금씩 바람 쪽으로 넘겨주는 데 가까웠다.

어느 날,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가지 끝에 붙어 있던 것들이
한순간 가볍게 흔들렸고,
몇 장은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풀려났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붙잡지 못하는 일에도
차례가 있다는 듯
봄빛은 잠시 흔들리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천천히 꺼냈다.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에
희미한 바람만 남아 있었다.

봄은 지나가고 있었고,
흩어진 것은 꽃잎뿐인데
비어 있는 쪽이,
더 오래 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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