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잡지 못했지만, 그는 내 안에서 피었다.
바다는 아직 식지 않은 겨울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의 사진이 바람에 가늘게 흔들릴 때마다
그의 웃음이 바람결에 묻어오는 듯했다.
햇살이 얼굴을 스쳤다.
보이지 않아도, 눈가가 아리게 따뜻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서 있던 방향은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오래된 봄의 온기가 섞여 있었다.
짠내가 혀끝에 스며들었다.
봄은 언제나 약속의 계절이었다.
누군가는 꽃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렸다.
그 차이는 멀지만, 마음은 닮아 있었다.
나에게 봄은, 그였다.
그와의 기억은 언제나 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고아원 마당이었다.
겨울이면 창가에 입김을 불어 서로의 이름을 그려 넣었고,
봄이면 운동장 끝 버드나무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은 작고 차가웠지만
그의 웃음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비 오는 날엔 지붕 밑에서 종이배를 띄웠고,
눈 오는 날엔 서로의 장갑을 바꿔 끼웠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자.”
그 약속은 어린 우리에게 봄보다 선명했다.
세월이 흘러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우리는 매달 한 번씩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회복지센터에서 일하며 아이들 곁을 지켰고,
나는 초등학교에서 글과 마음을 가르쳤다.
가끔 그가 손목을 주무르며 웃곤 했다.
“괜찮아. 추운 날엔 늘 이런가 봐.”
그의 말에는 가벼운 농담과 묘한 숨이 섞여 있었다.
그날도 아이들이 쓰고 간 낡은 책상 앞에서
그가 고장 난 난로를 고치고 있었다.
기름 냄새 속에서 그가 웃었다.
쇠냄새와 오래된 나뭇결의 냄새가 섞여
겨울이 잠시 눅눅하게 녹아내렸다.
“너는 여전히 봄 같아.”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는 여전히 겨울 같아. 차가운데 따뜻하지.”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아이들이 떠든 뒤의 고요 속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괜찮아?”
내가 물으면 그는 짧게 웃었다.
“괜찮아.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그 무렵, 내 시야도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불빛이 번지고, 글자가 물결처럼 울렁거렸다.
아이들의 얼굴이 잉크처럼 번져 나갔다.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시야가 더 줄 겁니다.”
책을 덮으면 잉크 냄새가 남았다.
그 냄새 속에 글자들이 흩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빛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로 세상을 기억하려 했다.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할까 봐,
그의 눈 속에서 내가 흐려지는 걸 차마 보여주지 못했다.
가끔은 그를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멀어지는 빛 사이로 그의 얼굴이 흔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어두워질수록
그의 온기는 더 선명했다.
퇴근길, 그는 내게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이거 마셔. 몸이 따뜻해야 하루가 덜 힘들잖아.”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책상 위엔 약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감기야. 별거 아냐.”
그가 웃었고, 나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며칠 뒤, 그는 다시 웃었다.
“괜찮아. 잠깐 무리했나 봐.”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그는 말했다.
“다음 달이면 버드나무에도 새순이 날 거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봄이 정말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녁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창밖 불빛이 물 위처럼 흔들렸고,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손끝을 스쳤다.
그날 밤, 그는 연락이 없었다.
새벽 무렵,
휴대전화의 진동이 잠을 깨웠다.
화면에는 센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오늘 새벽에… 그분이…”
짧은 숨소리만 남았다.
나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신호등의 불빛이 번지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 끝, 흰 커튼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입가엔 아직 미소가 남아 있었고,
손끝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내 손끝을 지나 가슴으로 번져왔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음이 목구멍 끝에서 멈췄다.
그의 온기가 아직 내 손바닥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눈앞의 모든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내 안에서, 여전히 빛으로 남아 있었다.
며칠 뒤, 우리는 그의 사진을 품에 안고 바다로 갔다.
친구들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햇살이 물결 위에서 부서졌다.
재를 흩뿌릴 때, 손끝의 소금기와 바람 냄새가 섞였다.
차가웠지만 익숙했다.
마지막에 닿았던 그의 손길 같았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그가 나를 불렀던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아.”
짧은 한마디가 파도에 실려 멀어졌다.
“이제,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그 말을 삼킨 바다 위로
한 줄기 빛이 천천히 흘러갔다.
파도 끝이 발목을 스치고,
모래알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봄이 다시 왔을 때,
나는 오래 닫아 두었던 교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공기 속에 분필 냄새가 퍼졌다.
창문을 더듬어 열자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커튼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먼지가 손끝에 닿았다.
교탁 위엔 아직도 그가 고치던 난로가 있었다.
그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자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칠판을 긋는 분필 소리,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그 소리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보이지 않아도, 그는 내 곁에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엔 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세상은 아직 따뜻했다.
그가 남긴 온기는,
지금도 이 자리에서 천천히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