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다시 피어나는 곳
1969년 봄이었다.
라디오마다 전쟁의 소식이 흘러나오던 날,
그는 제대까지 반년을 남겨두고 있었다.
“월남에 자원하면 수당이 많다더라.
그 돈으로 우리 집 앞에도 금낭화를 심자.”
그의 말은 결심처럼 들렸다.
창문 밖으로 불어온 바람이 희미한 먼지를 일으켰다.
바람이 말보다 먼저 내 마음에 닿았다.
나는 두려웠지만, 그 바람 사이로 그의 미소가 번졌다.
“이건 잠시의 이별이야. 돌아오면 진짜 봄을 만들자.”
처음 만난 건 2년 전, 학교 문학동아리였다.
그는 처음 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을 느꼈다고 했다.
나를 다시 보기 위해 문학동아리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눈빛에 햇살이 반사되어 잠시 나를 눈부시게 했다.
낡은 책상 위에 시집 한 권을 올려두고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시 좋아하세요?”
“봄 냄새가 나서요.”
그 말에 나는 웃었고, 그 미소는 내 기억 속 첫 봄빛이 되었다.
여름이면 우리는 학교 뒤 시냇가로 갔다.
그는 신발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갔다.
“생각보다 차네요.”
그가 물을 튀기자, 내 치마 끝이 젖었다.
맑은 물 위로 웃음이 흩어졌다.
풀 냄새와 물 냄새가 뒤섞여 여름의 숨결처럼 스며들었다.
가을이 되면 바람 부는 동산으로 올라갔다.
풀잎 사이로 벌레 소리가 번져 들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흘렀다.
그는 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요. 떨어질 듯, 붙잡히지 않는 빛이 있죠.”
“우리도 언젠가 저 별처럼 멀어질까요?”
“아니요. 서로를 잊지 않으면 빛은 남아요.”
그 말이 내 마음 어딘가에 오래 남았다.
바람이 불면 그의 옆얼굴이 살짝 내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작은 별처럼 떨렸다.
겨울에는 눈밭에서 함께 뒹굴었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뭉치며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집 앞마당에도 이런 눈이 쌓이겠지.”
그때는 그 말이 꿈처럼 들렸다.
졸업 후 그는 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주말마다 편지를 주고받았다.
잉크가 마르기 전 종이를 접으면, 그의 이름이 내 손끝에 번져왔다.
제대가 반년 남은 어느 날, 그는 말했다.
“파병 지원을 하려고 해. 조금만 기다려줘.”
나는 망설였지만, 그는 약속했다.
“돌아오면 봄마다 함께 금낭화를 보자.”
며칠 뒤,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얼굴이 많이 그을렸지만,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곧 떠나야 해. 하지만 꼭 돌아올게.”
그는 마당 앞 흙을 파기 시작했다.
“돌아오면, 이 자리에서 다시 보자.
매년 봄마다 금낭화가 피면, 그건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뜻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떨렸지만,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함께 손으로 흙을 덮었다.
흙은 차가웠지만, 그 온기가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바람이 불었다.
그의 손등 위의 먼지가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봄은 이미 그 자리에서 피고 있었다.
그가 월남으로 떠난 뒤에도 편지는 이어졌다.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서로의 안부가 종이 위를 오갔다.
그러나 그다음 봄부터 편지가 뜸해졌다.
우체통 앞에 서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먼 나라의 전쟁 소식이 흘러나왔고,
그가 있을 법한 지도 위의 이름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나는 여전히 편지를 썼다.
도착할지도, 혹은 영영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종이를 접는 순간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름이 지나고, 또 한 계절이 바뀌었다.
흙길에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굴러다닐 때,
우편배달부가 멈춰 서지 않고 지나갔다.
그날 이후, 우체통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그의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손에는 전보 한 장이 쥐어 있었다.
한 장의 전보, 오직 한 단어 — ‘행방불명.’
빗소리가 처마 밑으로 흘러내리고,
그녀의 손끝에서 종이의 물기가 떨어졌다.
그 순간, 내 안의 봄이 조용히 꺼졌다.
세월이 흘러 전쟁은 끝났다.
모두가 돌아왔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나는 오래된 금낭화 옆에 흰 금낭화를 심었다.
분홍빛은 약속의 기억, 흰빛은 용서의 온기였다.
봄바람이 불었다.
두 송이의 꽃이 함께 흔들리며,
그리움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창가 너머로 봄빛이 스며들었다.
흰 금낭화 잎 위에, 작은 햇살이 오래 머물렀다.
바람이 살짝 지나가며, 꽃잎이 천천히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