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라면과 첫 시식자
9화 라면 편
1992년 겨울, 내가 라면을 처음으로 끓였던 해이다.
무슨 이유였는지 그 당시 아빠랑 단둘이 슈퍼를 보고 있었다.
“아빠, 점심 뭐 먹을 거야?”
슈퍼집 딸내미는 진열된 과자 속에 파묻혀 근사한 점심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라면 먹을래?”
아빠의 실망스러운 메뉴 선정에 나는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도, 언니도 없어 먹고 싶은 거 왕창 먹을 수 있는 이 귀한 기회에 고작 선택한 메뉴가 라면 따위라니. 그 어린 마음에도 나는 부아라는 게 치밀어 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생고집을 피웠다.
“그럼 내가 라면 끓일게. 라면은 할매집에서 몇 번 끓여봤어. 내가 잘 끓여. 진짜야! “
나는 거짓말로 아빠를 속여 부엌을 장악했다. 엄마가 라면을 끓일 때를 떠올리며 큰 냄비에 물을 가득 채워 가게에서 가져온 안성탕면 두 봉지를 넣고,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냄새는 그럴싸했고, 내 재능을 의심하지 않았다. 들뜬 마음에 냄비 뚜껑을 열자 면발이 물에 잠겨 잘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흔히 먹는 라면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당황한 내가 그 순간 별별 생각을 다했었다. 이게 뭐라고 라면을 버리고 집을 나갈까? 까지 생각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빠랑 나랑 마주 앉아 라면을 먹었다. 아빠는 큰 냄비를 밥상 위에 놓고 면발을 건져 먹으며 다음에 물 조절만 잘하면 맛있는 라면이 될 거라며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나라면 화가 났을 텐데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아빠는 딸내미의 고집스러운 첫 라면을 그렇게 다 드셨다.
아직도 나는 라면을 끓일 때 물조절을 잘 못한다. 라면 봉지에 적힌 레시피대로 끓이는 그 단순한 작업을 못해 늘 부족하거나 넘치거 나를 반복한다. 부엌에 오신 아빠가 가스렌인지 위에서 아직도 끓고 있는 거대 냄비를 보고 얼마나 놀라셨을까. 느닷없이 그 해 겨울 내가 끓인 첫 라면과 첫 시식자 아빠가 떠오른다.
오늘은 불조절 실팬지 국물이 다 졸았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먹었다. 지금 나 보다 젊으셨던 그때의 아빠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