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과 국립공주박물관 답사 그리고 발견
이전 글에 지난여름 무령왕릉 방문 사진을 첨부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무령왕릉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방문하였을 때라, 전시관의 안내 문구들에 많이 의지한 관람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나 스스로도 다양한 기록들과 매체들을 접하며 무령왕릉에 대한 사실 발견을 해오고 이를 [해]와 [치]와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서인지, 이번 방문에는 무령왕과 그의 생애 그리고 백제라는 나라와 조금 더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령왕릉에 대하여 발견했던 사실들 중 나누고픈 몇 가지 이야기들을 이곳에 나누고자 한다.
무령왕릉의 발굴 과정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 건 사실이지만, 오롯이 우리 손에 발굴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고 감격스러운 발굴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백제사를 돌아볼 때 가루베 지온이라는 희대의 도굴꾼을 언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공주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일본어 교사 가루베 지온은 백제의 문화재와 유물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공주고보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후 초기 5년 동안 738기에 해당하는 고분들을 파헤쳤다고 한다. 심지어, 1940년 그는 그 스스로 백제의 1,000개의 고분을 조사했다고 당당하게 밝혔으며, 그중 100여 개에 대해서는 고고학 잡지에 연재하기도 했다.
송산리 6호분 또한 가루베가 찾아낸 고분이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가루베가 수많은 고분을 파헤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나 도움을 받아서였을까? 아니었다. 그는 총독부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 고분들을 도굴하기 시작했다. 송산리 6호분 또한 허가 없이 도굴한 무덤 중 하나이다. 그는 송산리 6호분을 멋대로 파헤치고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헤집고 다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였을 때, 이미 내부는 깨끗하게 정리가 된 상태로 어떠한 유물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가루베를 추궁했지만 가루베는 원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발뺌할 뿐이었다.
해방된 후, 우리나라 약탈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가루베는 표적이 되었으나, 가루베의 유족이 고작 백제 기와 4점을 공주박물관에 반환한 것 외에는 우리의 유물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무령왕릉이 가루베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근처의 송산리 6호분까지 파헤친 그가 무령왕릉을 발견했다면, 그 안의 유물들은 물론 누구의 무덤이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시 무령왕릉은 현재보다 봉분도 높지 않았으며, 송산리 5호분, 6호분과 매우 가깝게 붙어있어서 또 다른 능이 바로 옆에 숨어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덕분에 무사히 지켜질 수 있었고, 완벽한 발굴 과정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손에 발굴될 수 있었다.
나는 <발견 그리고 덧댐과 이음>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고려청자의 발견과 덧댐을 할 적에도 그러했지만, 유독 우리 유물을 선조들의 동의 없이 침해해온 자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를 꼭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만큼 우리의 것에 애정을 덧대준 분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고려청자를 이야기하며 간송 전형필 선생님과 존 개스비를 꼭 이야기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령왕릉은 발굴과 동시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들을 쏟아냈다. 그중 몇몇 유물들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 기록 속 정보들이 실제 역사와 일치함을 입증해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年 六十二歲癸卯年 五月丙戌朔七日壬辰 崩到
乙巳年 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登冠大墓立志如左
번역)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해 계묘년 5월 7일 임진일에 돌아가셔서, 을사년8월 12일 갑신일에 등관의 대묘에 모시고 왼쪽과 같이 기록한다.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을 때 왕릉의 주인을 밝혀준 중요한 역할을 한 유물, ‘지석(국보 제163호)’이 무덤 널길 놓여있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의 지석이 발굴되었다. 이 지석은 매지권(買地券)으로 신에게 왕과 왕비의 묘소로 사용할 땅을 사들이겠다는 내용을 돌에 새긴 문서이다.
지석의 첫머리에 새겨진 문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무령왕릉이 발굴되던 당시 함께 있던 고고학자들을 설레게 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이 양나라에서 받은 벼슬이 ‘영동대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석에는 무령왕과 왕비 부부가 언제 죽어 언제 매장되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망 연대가 정확하게 ‘삼국사기’와 일치했다고 한다. 이 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줌과 동시에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덕분에 삼국사기는 한국사적으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사료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은 역사 기록 속에 언급된 ‘금꽃’의 실물을 입증하였다.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은 비단으로 제작된 관모에 꽂아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왕의 금제 관식은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좌우 비대칭의 형태로 제작되어있으며, 왕비의 금제관식은 그 무늬가 좌우 대칭의 형태를 띤다.
<삼국사기>, <신당서>, <구당서> 와 같은 사료에 백제의 왕은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을 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무령왕릉의 이 두 금제 관식을 통해 역사 속에서 나타나던 금꽃이 이러한 형태이지 않았을까 하는 그 상상을 넘어 실제로 그 형태를 후대 들에가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님이신 이한상 교수님도 무령왕릉에서 소개하고픈 유물들로 도안이 아름답다는 점, 역사 기록 속 ‘금꽃’ 실물이라는 점에서 왕과 왕비의 관식을 추천해주신 바 있다.
역사를 추정해가다 보면 자연스레 기록물들에 우선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 과정에서 종종 그 기록들이 얼마나 정확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거나, 기록에 묘사된 당시의 모습들을 실제로 보지 못해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참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역사 기록들이 우리에게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을 많은 부분 입증해준 셈이다.
진묘수와 무령왕릉의 발굴 전날 김영배 관장의 꿈 이야기 등 더 많은 내용을 쓸까 했지만, 우리의 무령왕릉 발견 발행본에 기록될 예정이므로 이쯤에서 줄이기로 한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항상 해온 말들이 있다. “역사가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지루했을까?” “우리나라의 역사가 더 많은 분들께 흥미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리서치를 해가는 모든 과정이 다 흥미롭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해]와 [치]와 무령왕릉에 대해 알아가면서는 우리가 단순히 역사적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역사가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책에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설명에서 주입식으로 입력되는 역사가 아닌, 자발적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 보는 방법 그리고 그곳에서 느끼는 재미와 희열까지. 이 또한 많은 분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글에서는 [치]가 준비해주어 [도해치]가 두 차례 이어서 진행한 '내가 이 세상에 어떤 가치를 남기고 싶은지'에 대한 워크숍과 '무령왕의 업적을 파헤쳐보고, 그 업적 중 오래 회자되었으면 업적의 키워드'를 추려보는 워크숍에 대해 적어볼 예정이다.
[도해치]의 [도]
기획자 도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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